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이럴 때일수록 높은 산에 오르면 더 쾌적해진다고 호기를 부려보지만 숨이 턱에 닿습니다. 함께 걷던 친구들이 “오늘은 대충 올라가다 계곡물에 발이나 담그자”고 유혹합니다. 이런 더위엔 지는 척하고 들어주는 게 상책입니다. 과실을 익히고 알곡을 살찌울 이 계절 햇볕에는 항거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기, 우리들 중 누군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문상이랍시고 영정 앞에 절하고 돈 봉투 놓고 하잖아. 그렇게들 말고 이 세상 떠날 때쯤, 그러니까 아직 의식이 있을 때 좋아하던 사람들 불러다 놓고 영결식을 하면 어떨까?”

“야, 이놈 이거 웃기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어떤 놈이 얼마 들고 오는지 지켜보겠다 이거 아냐?”

코딱지만 한 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나니 그래도 한결 견딜 만합니다. 이런저런 객쩍은 소리 나누다 문득 한참 전에 아들이 권해서 읽어보고는 오래도록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던 생각이 떠올라 한번 운을 떼어 본 것인데 반응이 영 엉뚱합니다. 벌건 대낮에 웬 뚱딴지같은 헛소리냐는 힐책입니다. ‘아직 때가 이른가? 아니면 분위기가 아닌가?’

그 자리에선 더 이상 입을 열지는 못했지만 내심 꽤 심각하게 골몰하던 생각입니다. ‘아직은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의식이 말짱할 때 사랑하는 가족과 다정했던 벗들을 불러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어떤 이에게는 정말 고마웠다고, 또 어떤 이에게는 정말 미안했다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함께해준 모든 이들에게 두루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생의 마감일까.’

그런데 뭐, 돈 봉투 들고 오는지 않는지 보려고 그러느냐고? 고얀 놈 같으니. 아마도 그런 책은 읽어본 적도 없고, 그런 데 생각이 미치지도 않아서 생긴 오해일 겁니다.

▲ 2010년 가을 서울을 방문해 자신의 책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던 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는 제자들이 루게릭병으로 회복 불가능해진 스승을 위해 그 생전에 영결식을 베풀어드립니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는 노 교수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따뜻한 눈길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행복하게 일생을 마감합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한 대학촌에서 있었던 실화로 모리 교수의 제자인 미치 앨봄이 책으로 엮어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고 합니다. 평소 실무 서적에만 열을 올리는 것 같던 아들이 들고 온 것으로 보아 젊은 나이에도 느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랑하던 이의 혼백이 이승을 훌쩍 떠나서 저승으로 날아간 다음 그 껍데기를 놓고 울고불고하는 것이 참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느니 혼이 아직 몸속에 남아 있을 때, 육신이 아직 차가운 빈껍데기가 되기 전에 따뜻한 손목을 맞잡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하지 못한 인사말을 주고받고 작별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친구의 뼈아픈 지적처럼 그것이 또 다른 욕심의 발로라면 하지 않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정승이 죽으면 어쩐다"는 속담까지 바뀌는 괴현상이 벌어진다면 정말 한심한 인생이 아닙니까. 그런 염려만 피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 가족들과, 다정했던 친지들과 보다 뜻 깊은 고별식을 치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절기로든 분위기로든 역시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언젠가 싸늘한 바람에 낙엽이 흩날리며 마음이 스산해지는 늦가을 오후쯤, 아니면 하얀 눈이 내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겨울날 저녁쯤 마음이 통할 만한 이들과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매미 소리가 선풍기 소리보다 더 시원스럽습니다. 보통은 7년, 길게는 17년 동안 땅속에서만 살다가 우화로 무거운 탈을 벗고 겨우 보름 정도 성충으로 살며 저토록 애절하게 사랑의 노래를 부르다가 죽는다니 그 일생이 참으로 장렬하게 느껴집니다. 거기 비하면 인생은 너무 길게 늘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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