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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벗었다
노경아 2022년 07월 22일 (금) 00:01:55

오후 3시. 이 시간이면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눈 뜨고 있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커피를 마시고 목 운동도 해 보지만 떨어질 대로 떨어진 집중력을 되찾긴 어렵습니다.

이럴 땐 옥상으로 올라가는 게 상책입니다. 자연 바람을 맞으며 마룻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요가를 하고 나면 잠이 확 달아납니다. ‘고양이 자세’ ‘개 자세’로 어깨와 등을 스트레칭한 후 일어서서 ‘전사 자세’ ‘나무 자세’로 허리와 팔, 다리까지 풀어주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아뿔싸! 도로 건너편 새로 지은 빌딩의 사무실 입주가 마무리된 걸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무처럼 한 발로 곧게 서서 손을 모아 두 팔을 쭉 뻗고 있으니 보는 눈들이 많습니다. 20층 이상 사무실 창가에 몇몇이 붙어 서서 구경을 합니다. 저의 요상한 모습이 그들의 스마트폰에 찍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옥상도 글렀습니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뙤약볕 아래 서울역에서 염천교를 건너 중림동까지 20분 정도 걷기입니다. 이 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는 바로 간판 읽기입니다. 쥴리안제화, 파파제화, 더존댄스화, 이태리제화, 부라보제화, 드봉제화, 굳이어제화…. 구둣방 이름이 외래어표기법에 어긋나지만 하나같이 정겹기 그지없습니다. 왠지 주인장들의 깊은 내공까지도 느껴집니다.

당장이라도 백구두를 신은 ‘모던 보이들’이 나타나 탭댄스를 출 것만 같습니다. 꽃분홍 맞춤 구두를 신은 여성들이 구둣방 미닫이문을 열고 나와 모던 보이들과 손잡고 함께 춤추며 경성역으로 갈 것만 같습니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이겠지요.

이 길을 걷다 보니 나도 이곳에서 하이힐을 맞춰 신은 기억이 납니다. 신문사에 첫발을 내디뎠던 1995년입니다. 아버지와 인천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오래된 구둣방에 들어갔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개나리가 활짝 핀 길을 걸었으니 4월쯤일 겁니다.

구둣방 주인장은 내 발을 유심히 본 후 말했습니다. “이 발은 짧지만 볼이 넓어 맞춤 구두만 신어야 해요.” 상술이 뛰어난 주인장이었죠. 일주일 뒤 발목에 끈이 달린 개나리색 하이힐이 회사로 배달돼 왔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마지막(다음다음 해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선물입니다.

나는 하이힐이 좋습니다. 하이힐은 세련된 도시 여성의 상징이기 때문이죠. 하이힐을 신으면 마술처럼 맵시가 살아날 뿐만 아니라 당당하고 도도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특히 나처럼 키 작은 여성의 경우 구두의 굽 높이는 자존심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지금껏 하이힐을 못 벗은 이유입니다.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문 열린 구둣방이 있어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반갑게 받아줍니다. 문 닫은 가게가 많다고 하니 “요샌 맞춤화든 기성화든 구두 신는 사람이 없응게로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라요”라고 합니다. 청바지뿐만 아니라 정장 바지에도, 치마에도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는 직장인이 늘어나면서 구둣방이 하나둘씩 사라졌던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재택근무가 많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퇴근길 사람들의 발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열 명 중 대여섯 명은 운동화를 신고 있습니다. 두세 명은 슬리퍼 혹은 굽 낮은 샌들을 신고 있고요. 하이힐을 신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운동화는 운동할 때 신는 신발이라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이제 발과 무릎, 허리를 위해 높은 굽에서 내려와야겠습니다. 하이힐은 사무실 책상 옆에 두고 꼭 필요할 때만 신으렵니다. 하이힐을 벗고 운동화를 신으니 발이 편합니다. 발이 편하니 정신도 맑아집니다. 출근 복장은 정장에 하이힐이라는 공식이 깨졌으니 거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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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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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빈 (1.XXX.XXX.202)
명품 수제화거리를 걸으셨군요.
넥타이 없어지고 정장이 없어지니 불편한 구두도 자연히 없어져 가는 추세입니다.
저는 어머님이 제 첫입사했던 해 겨울(91.12.30)에 50의 나이로 별이 되셔서 더 애틋합니다. 평생 치아가 안 좋아 좋은 거 못 드셨던 어머님을 위해 임플란트 해 드리려고 연말선물을 준비했는데, 고향 내려가기 전날 그만....
건강을 위해 노력하시는 필자님의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탁족식에서 뵈옵기를 희망하며.... 막바지 더위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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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5 08: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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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 (116.XXX.XXX.129)
대장님, 서늘한 계곡에 앉아 막걸리 한잔 못 마시고 여름을 보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요즘엔 새벽운동도 시작했습니다. 집 앞 공원에 있는 운동기구로 한 시간 정도 뭄을 푸는데, 뭔가 뿌듯합니다. ㅎㅎ
이문동으로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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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9 10: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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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빈 (14.XXX.XXX.141)
골프에 푹 빠지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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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0 10: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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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용 (220.XXX.XXX.57)
아버지께서 사주신 마지막 선물-
끈이 달린 개나리색 하이힐 지금도 보관하고 계시나요?
참 마음이 찡 하내요-----
아버지께선 죽음을 예측 했을까요?
사랑하는 딸에게 신발을 선물하시고 Well-dying 하솃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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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2 11: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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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 (116.XXX.XXX.129)
넘 늦은 답글이라 송구함이 앞섭니다.
한 달 만에 이곳에 왔나 봅니다.

아버지께서 사주셨던 노란색 하이힐은 닳아 떨어질 때까지 10여 년간 잘 신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았던 아버지께선 죽음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신 후 일기장을 찾았는데, "넷째가 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니 좋다. 손잡고 가서 작은 선물을 사줬다. 남대문시장에서 마신 막걸리가 달았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정이 참 많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정이 그리워 아릴 때가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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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9 10: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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