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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김수종 2022년 07월 13일 (수) 00:00:17

'5공 남산의 부장들'이란 신간 책을 읽으며 6월 하순의 더위를 피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 김충식 가천대 교수가 20여 년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관계자를 인터뷰하여 5공 전두환 정권의 출현에서 몰락까지의 과정을 정보 수장이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논픽션 역작입니다.

'남산'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자유칼럼 독자들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지 궁금합니다. 40세 이하의 젊은이들이라면 애국가의 가사 '남산 위에 저 소나무'에 나오는 바로 그 남산의 이미지만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환갑을 넘긴 사람들은 산의 이미지와 더불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옛 중앙정보부 또는 안기부의 폭력적 권력이 행사되던 곳을 떠올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렇습니다. '남산'은 20세기 후반, 특히 유신정권과 5공 전두환 정권 시절의 '흑역사'를 상징하는 시대적 언어였습니다. 체제에 비판적 생각을 내비쳤던 야당정치인, 학생‧시민, 언론인‧지식인들이 툭하면 잡혀가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고 또 친북으로 조작되기도 했던 곳이 '남산'입니다. "남산 갔다왔다"는 말은 남산에 등산갔다 왔다는 뜻이 아니라 남산 정보기관에 잡혀가 혹독하게 고초를 겪었다는 뜻으로 이해되었습니다./같은 시대에 기자 생활을 했기에 그 시대의 사건들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남산의 부장들'을 읽으니 현대사의 현장을 다시 생생히 들여다보는 듯했습니다. 남산의 부장 다섯 사람, 즉 전두환 유학성 노신영 장세동 안무혁이 전두환 권력 강화를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복기하며 이 책을 읽는 묘미가 컸습니다. 12‧12 군사정변 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서리)을 탐하는 과정을 읽으면서 당시 권력 세계에서 '남산의 부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는 장면을 담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흥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의 극본이 바로 김충식 교수가 1990년대 초 펴낸 '남산의 부장들'에 기초해 쓰인 것입니다. '남산의 부장들'이 박정희 시대의 정보부 얘기라면 '5공 남산의 부장들'은 전두환 시대의 안기부 얘기입니다. /저자 김충식은 이 책을 쓰면서 대단한 집념과 에너지를 발휘했습니다. 무려 120권의 참고문헌을 섭렵했습니다. 당시 사건 주역들의 자서전과 학자 및 언론인들이 펴낸 다큐멘터리,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 정권의 주역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 같습니다. 거기다 오랜 기자생활에서 우러나온 취재력과 문장력, 그리고 저자 자신이 기사 때문에 남산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경험담이 강력 접착제처럼 책 내용의 밀도를 높였습니다.

책을 덮으며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남산의 부장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1년에 한두 번 저자를 만날 기회가 생기곤 하는데, 다시 만나면 '세곡동의 부장들'을 펴내 보라고 농담을 던질 참이었습니다. 세곡동은 정보부와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이 자리 잡고 있는 서초구의 동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 책을 다 읽고 난 며칠 후 서훈‧ 박지원 두 전직 국정원장이 자신들이 몸담았던 국정원의 고발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다는 놀라운 뉴스가 터졌습니다. 모두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장들입니다. 서훈 전 원장은 배를 타고 탈북한 북한 사람들을 제대로 조사도 않고 서둘러 송환하도록 했다는 혐의로, 박지원 원장은 북한에 의해 피살된 어업지도선 승선 공무원에 대한 국정원 내 정보보고를 폐기했다는 혐의로 수사한다는 게 보도 내용입니다. /과거 남산의 부장들이 피의자에게 친북 색깔을 씌우려고 했다면,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장들은 김정은 정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대조적인 풀이가 나옵니다./이 사건은 수사결과와 정치적 논쟁을 거치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맥락을 짚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이와는 별도로 박지원 전 원장이 퇴임하자마자 언론 인터뷰를 통해 뉴스메이커가 되는 것은 놀라웠습니다. 깊은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부각하는 데 탁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직 국정원장이 저렇게 자신을 노출시키는 게 좋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보기관의 비밀스러움이 과거 흑역사의 원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정보 활동의 본령은 비밀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초의 '남산의 부장'이었던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의 모델이 미국의 CIA였다고 회고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CIA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서냉전이 격화되면서 적대국인 소련에 대한 정보수집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1947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해외 작전으로 많은 논란도 일으켰지만 대외첩보가 주된 업무입니다. 중앙정보부는 CIA 모델을 들여오면서 대외첩보는 물론 정권보호를 위한 국내사찰과 수사권을 덧붙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기관이 된 것입니다. /정보기관의 필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나라는 영국입니다. 영국은 20세기 초에 국내정보기관 MI5와 대외정보기관 MI6을 창설했습니다. 007 스파이 영화에 등장하는 정보기관이 바로 MI6입니다. 미국의 CIA도 MI6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MI6의 모토는 '언제나 비밀'(Always Secret)입니다. 영국은 스파이 활동을 잘해서 1,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MI6이든 CIA든 본질은 스파이 조직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CIA 국장을 스파이 대장(Spy Chief)이라고 통칭합니다.

'남산의 부장들'이 설쳐댔던 야만의 시대는 흘러갔지만 정보기관의 부침이 아직도 심한 것 같습니다. 결국 정치의 수준이 정보기관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정보기관은 본질적으로 스파이 미션 조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록 민주적은 아니지만 숨어서 조용히 한국의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주는 그런 국정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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