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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이 140 나오셨습니다”
황경춘 2022년 06월 15일 (수) 00:00:02

제가 정기적으로 신장 투석치료를 받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투석치료는 4시간 동안 계속되는데, 30분마다 간호사가 환자의 혈압을 측정합니다. 그날은 처음 보는 아주 젊은 간호사가 측정 당번이었습니다. 그 간호사는 측정을 마치고는 “140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한 뒤 다른 환자에게로 옮겨갔습니다. 보통은 “140입니다” 또는 “140 나왔습니다”라고 들어왔던 저는 “140 나오셨습니다”라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제가 90대 후반의 할아버지 환자이다 보니 아마도 간호사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어르신께 대한 예우로 그런 표현을 한 것이겠지만 혈압수치를 보고하면서 “140 나오셨습니다”라고 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존댓말 사용법이 어렵다는 말은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 사람들로부터 가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으로 한글과 주어, 동사의 순서와 문법까지 거의 비슷한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까지도 한국어의 존댓말 사용법이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존댓말 사용법에서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자기 가족이나 직장 사람을 외부에 소개하거나 언급할 때 우리나라와 달리 존댓말을 쓰지 않습니다. 직장에 사장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에도 직원은 “사장은 지금 출장 중입니다”라고 사장에 대한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버지를 바꿔달라는 전화에 “아버지는 지금 외출 중입니다”라고 답해도 실례가 되지 않습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과공비례(過恭非禮)라 하여 과잉으로 예의를 갖추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해왔고, 이웃나라 일본에도 우리와 비슷한 교훈이 있습니다.

흔히들 무의식적으로 범하기 쉬운 과잉존칭의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병원이나 약국에서 받아오는 약 봉투에는 'OOO 귀하'라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환자의 이름만 적어 넣으면 되는데, 이름 끝에 '님'자를 무의식적으로 첨가할 때가 있습니다. 결국 약 봉투에는 'OOO님 귀하'라고 남게 됩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혈압이140 나오셨습니다”라고 했던 경우와 같이 존칭이 잘못 사용된 또 하나의 예입니다. 이런 오류는 특히 고령자를 상대할 때 더욱 범하기 쉽습니다.

고령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어 화제를 바꿔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자면 ‘최고령 TV 음악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된 송해(宋海) 씨가 지난주에 9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그를 추모하는 신문기사들 중 '천국~노래자랑'이라는 어느 기사의 제목이 눈에 띄어 그 제목을 다시 읽어보니 고인이 생전에 진행했던 프로그램의 오프닝멘트 “전국~ 노래자랑”을 원용한 제목이어서 잠시 숨을 죽이고 그 글을 읽었습니다. 고인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무료 급식소가 있는 낙원동 ‘송해길’ 인근 단골식당에서 식사를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담긴 회고기사를 가슴 아프게 읽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지면 관계도 있었겠지만 고인의 왕성한 생전활동에 비해 기사가 너무 소박했다는 점입니다.

주말에 그가 없는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을 TV로 보니, 34년 동안 그가 사회를 봤던 프로그램에 열 명 이상의 예능계 후배들이 출연해 지난날 그와의 정겨운 추억을 눈물을 감추며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따뜻하고 고인에 대해 충분한 예의를 갖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지나치지도, 소홀하지도 않은 추모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일상의 대화든 호칭이든 다른 사람에 대한 추모든 찬양이든 모든 게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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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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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상 (14.XXX.XXX.154)
커피 나오셨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2천원이십니다... 학교에서 이리 배우진 않았을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왜 이렇게 길들일까요? 일상 말은 지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깔끔하게 말하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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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7 09: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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