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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맛 ‘미스김라일락’
노경아 2022년 05월 18일 (수) 00:00:13

봄의 끝자락에 ‘미스김라일락’이 가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햇살 따뜻한 곳에 연보랏빛 미스김라일락 꽃이 구름처럼 피어 있습니다. 이맘때면 야근하는 날이 행복합니다. 한밤중 라일락 향기로 물든 ‘서울로 7017’을 걷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밤이 되면 라일락 꽃향기가 더 짙어지거든요. 캔 맥주 하나 사 들고 벤치에 앉아 홀짝대다 보면 고급스러운 향에 빠져들어 절로 흥얼거리게 됩니다.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 비 흩날린 가을 오면 아침 찬 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휙~ 봄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면 아주 잠깐 현기증이 느껴지는데, 술에 취한 건지 꽃향에 취한 건지 매번 헷갈립니다. 미스김라일락은 우리 토종 라일락인 수수꽃다리보다 향기가 두 배는 더 짙은 듯합니다. 생명력도 강해 수수꽃다리는 꽃이 다 졌는데, 미스김은 한동안 더 향기를 뿜어내며 생글생글 웃을 것 같습니다.

수수꽃다리는 잡곡 수수에 피는 꽃에 ‘다리’를 붙인 이름으로, 수수 이삭처럼 꽃이 한데 뭉쳐 탐스럽게 핀 모습에서 유래했습니다. ‘수수꽃이 달리는 나무’를 줄인, 참 예쁜 이름입니다.

반면에 미스김라일락은 아쉬움이 드는 이름입니다. 1947년 미군정청 소속 식물채집가 엘윈 M. 미더(Elwin M. Meader)가 북한산 바위틈에서 수수꽃다리 종자를 채취해 미국으로 가져간 뒤 품종을 개량한 것이 미스김라일락입니다. 당시 미더를 도왔던 여성의 성(姓)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그 ‘미스 김’은 학덕(學德)이 높은 여성이었을 겁니다. 70여 년 전 외국인을 도울 정도라면 영어든 우리말이든 소통이 원활한 사람이었을 테죠. 식물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고요. 그러니 ‘김선생라일락’ 혹은 ‘경아씨라일락’처럼 그녀의 이름을 넣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첫사랑의 맛이 궁금해? 라일락 잎을 깨물어 봐. 그럼 알 수 있어.” “진짜? … 꺄악~~아이 써. 퉤퉤! 이 나쁜 놈!” “그렇게 써? 거짓말한 거 아니야. 나도 어디선가 읽은 거야. 미안미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연인이 한바탕 귀여운 소란을 떨고 갑니다. 첫사랑의 맛이라고? 너무도 궁금해 잎을 따 살짝 깨물어봤습니다. 그녀가 욕을 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쓰디씁니다. 첫사랑이 잘 이뤄지지 않아 생긴 말이지 싶습니다. 쓰디쓴 맛에는 아련하고 슬프고 미련이 남은 첫사랑에 대한 감정이 담겨 있겠지요.

‘첫사랑’ 하면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1973년)이 떠오릅니다. 금아 선생은 열일곱 살부터 마흔넷까지 27년 동안 아사코와의 세 차례 짧은 만남을 ‘인연’으로 풀어놓았습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에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글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운명의 벽에 부딪혀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이라면 억지로 만나 후회하는 것보단 ‘그리움의 응어리’로 남기는 게 더 아름답지 싶습니다.

각박한 일상에서 옛 인연(굳이 첫사랑이 아니라도)을 떠올리는 일은 잔잔한 기쁨입니다. 라일락 덕분에 오래전 기억들이 살아 움직이니, 오월은 생명의 계절이 맞습니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 궁금해집니다. 부디 소중한 인연으로 기억되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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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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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용 (220.XXX.XXX.57)
바쁘다는 핑게로 이데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ㅎㅎ
울 노경아님은 거짓이없고 솔직한 성품의 소유자로써,
이 시대의 지식인이요, Free column도 잘 쓰신 존경받을 사람으로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이름도 이쁘고, ---- 얼굴은 한번도 본적이 없어셔 모르지만,
성품이 아름다우니 당연히 얼굴도 아름답겠죠?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지성인으로 기억 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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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6 15: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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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타빈 (1.XXX.XXX.202)
첫사랑은 쓰지요.... 그래서 아리고 더 아련한 거 아닐까요?
근 60 평생 살아보니, 즐거웠던 일 보다는 아쉬웠던 것들이 더 그립고, 오래 기억되니 말입니다. 나만 그런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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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8 11: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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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 (116.XXX.XXX.129)
첫사랑의 기억이 없는 저는, 스스로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파릇파릇하던 시절 도대체 뭘 했던 걸까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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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8 18:4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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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빈 (1.XXX.XXX.202)
라일락이 그냥 수수꽃다리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요.
미스노라일락이나 경아씨라일락이면 더 좋았겠다 싶습니다.
라일락은 다 졌지만, 조만간 노을공원변을 멋지게 함께 뛰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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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8 11: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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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 (116.XXX.XXX.129)
라일락은 수수꽃다리의 개량종이라 좀 더 오래 꽃을 피우는 것 같습니다. 베사메 무초의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의 리라꽃도 라일락입니다.
노을공원변 마라톤, 늘 가슴 뛰게 하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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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8 18: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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