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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에 딴짓 한 번도 안한 놈 있는겨?”
함인희 2022년 04월 13일 (수) 00:00:22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블루베리 농장이 있는 당산마을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모두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서 그런가, 옆집 숟가락 젓가락이 몇 벌인지, 아랫집 안방 장롱에 어떤 옷이 걸려있는지, 윗집 아들 내외는 언제 다녀갔는지 훤~~~하답니다.

어르신들 소싯적 바람피운 사연은 이곳 비밀 이야기의 단골 메뉴 중 하나입니다. 베트남 며느리를 본 전(全)씨 할아버지는 한창때 읍내 미용실에서 일하던 과수댁과 눈이 맞았다네요. 둘 사이에 아들 낳고 딴 살림까지 차렸는데, 그만 과수댁이 어린 아들만 남겨둔 채 몰래 떠났답니다.

전씨 할머니(정작 할머니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네요),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아들 눈 딱 감고 내 자식으로 키울까도 생각했었지만, 남편 하는 꼴이 하도 괘씸하여 불쌍한 어린 것을 고아원인지 보육원인지에 데려다주었답니다. 오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이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는 할머니. '곁에 두고 미워하느니 차라리 잘한 일'이라는 자식들 말을 위안 삼으면서도, 나중에 벌 받을 것 같은 기분은 떨칠 수가 없다시네요. 여편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씨 할아버지는 2년 전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이후 지금은 당신 몸 챙기는 데 올인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얀 와이셔츠에 백(白)바지 입고 백(白)구두까지 신은 채 백발을 휘날리며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안씨 아저씨 사연도 전씨 할아버지 못지않습니다. “왕년에 딴짓 한 번도 안한 놈 있는겨?”가 안씨 아저씨의 단골 멘트죠. 안씨 아저씨가 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염색약만 바르면 두피(頭皮)가 가려워 도무지 참을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머리 색깔만 아니면 누가 날 70대로 보겄소? 50대지.”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안씨 아저씨는 마을 아주머니들에겐 공공의 적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때 빼고 광내고 조치원 시내를 활보하는 아저씨를 보면 “예전 버릇 하나도 못 버렸다”며 눈총을 주는 아주머님이 한두 분이 아닙니다. “남편 절대 떠받들지 마,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그랴.” 타박받는 데 이골났지만, 오늘도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보살피는 안씨 아주머니의 속내를 그 누가 알겠습니까.

몇 년 전에도 월산리 이장님 덕분에 온 동네가 왁자지껄 떠들썩했습니다. 이장님은 주중엔 농사짓고 주말엔 서울 가서 직거래장터 이곳저곳을 돌며 농사지은 것을 판매했는데요, 서울 오르내리며 함께 장사하던 ‘여인’과 그만 바람이 나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남편의 바람을 알아챈 이장님 부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출을 했다네요. 부인 또한 기구한 사연의 주인공으로, 어린 시절 부모님 여의고 홀로 자랐답니다. 오갈 데 없던 부인은 동네 농협의 직원식당에 임시 일자리도 얻고 숙식도 해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비밀이 없는 마을답게 온 동네 분들이 이장님 부부에게 훈수를 두러 나섰습니다. 이장님 편에서는 “여편네가 그만(한) 일에 집을 나가면 어쩌자는겨. 노모 모시는 ㅈㅇ(이장님 이름)이 사정이 딱하구먼.” “어찌 되얐건 마누라에게 가서 싹싹 빌고 데리고 들어와. 시간 끌면 자네만 손해인겨.” 이렇게 훈수를 두고, 이장님 부인한테 가서는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집으로 들어가. 집 나와 봐야 고생이지.” “이 참에 각서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녀?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혀.” 이렇게 훈수를 두느라 한동안 시끌시끌했습니다.

와중에 이장님 댁 사연도 들었습지요. 이장님 아버님의 첫째 부인이 아이를 못 낳아 둘째 부인을 들이셨는데, 거기서 태어난 첫아들이 이장님이랍니다. 그 밑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났답니다. 한데 둘째 부인이 아이 셋을 낳는 동안 첫째 부인도 기적처럼 아들 하나를 낳았다네요. 두 명의 부인과 한 지붕 아래 살던 이장님 아버님은 ‘부인들 시기 질투 등쌀을 견디지 못하고 농약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연이었습니다.

한데 이장님 부인의 가출은 뜻밖의 계기를 만나 해피엔딩을 장식했습니다. 이장님이 농협에서 지원해주는 종합건강검진에서 대장암이 발견된 겁니다. 부랴부랴 건양대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장님 부인, “내 남편은 내 손으로 지키겠노라”며 그 길로 달려갔더랍니다. 간병하겠다고 이장님 병상을 지키던 “불륜녀”를 단칼에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며칠 후 들려왔습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서로 비밀이 없다 보니 내 남편의 바람도 그저 한 때의 바람(風)이었겠거니 너그러워지고, 문드러졌을 법한 아내들 마음도 동병상련(同病相憐) 속에서 견딜만해지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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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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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림 (222.XXX.XXX.90)
사실적인 글 재밌습니다. 등장인물들은 괴로웠을 테고요. 또한 운명을 탓 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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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3 09:3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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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227 (221.XXX.XXX.151)
댓글, 반갑습니다.

전 마을 어르신들과 수다를 떨면서 "이야기"가 주는 위로의 힘을 새삼 느끼곤 합니다. 서울살이 시절엔 같은 층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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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4 21: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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