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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2)
박종진 2022년 03월 23일 (수) 00:01:11

가장 오래된 ‘코란’은 제3대 칼리프 우스만(644~656 재위) 때 만들어진 것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습니다. 사실 이 코란은 ‘우스만 코란’ 또는 ‘피 묻은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피 묻은 성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우스만이 이 코란을 읽고 있을 때 암살당했고, 그의 피가 이 코란에 묻었기 때문입니다. 쿠피체라는 옛 아라비아 문자로 사슴가죽에 쓴 것으로 종이로 배접되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코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종이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정설에 의하면 종이를 만드는 기술 즉, 제지술이 이슬람에 전해진 것은 고선지 장군이 출전한 751년 탈라스 전투 이후로 보는데, 피 묻은 코란을 배접한 종이는 어디서 온 종이일까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제지술과 종이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종이는 위 사실만 봐도 적어도 탈라스 전투 100년 전부터 이슬람권에 들어와 있었고,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향신료와 비단길을 따라서 무역을 하던 대상(隊商)들에겐 종이는 그들의 거래품목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의 고객 중에는 터키의 카간에게 답장을 종이로 보냈다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왕 호스로우 1세(531~579)와, 양피지의 냄새를 싫어하여 중국 종이만 사용했다는 호스로우 2세(590~628)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지역에는 종이를 만드는 제지 공장이 있었던 적이 없었고, 출판물의 대부분은 파피루스와 양피지였습니다.

그렇담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투에서 잡힌 당나라 포로들 중 제지공이 있어 제지술이 전해졌고, 이렇게 지어진 것이 서방 제1호 사마르칸트 제지 공장이란 것입니다. 이 공장이 세워진 것이 751년설과 757년설이 있는데, 757년이 말이 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포로 몇 명을 잡았다고 몇 년 뒤 공장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정말 필요한 수요가 있었다면 가능한 일 이겠지요 . 수요는 바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거대한 생각의 크기를 파피루스와 양피지로는 담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794년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 10세기 중반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이집트에 제지 공장이 세워집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종이는 계속 이동합니다. 이제 바다를 건너면 유럽입니다.

중세 한 수도사가 양피지를 우유 등으로 닦고 부석(浮石)으로 벅벅 문질렀습니다. 수도사는 이 양피지에 위대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연구가 담긴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수도사는 그저 기도문을 적기 위한 양피지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원문을 전부 또는 일부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 쓴 필사본을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라고 합니다.

팰림프세스트가 만들어진 이유는 양피지가 매우 비쌌기 때문입니다. 7세기부터 유럽은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파피루스의 거래가 차단되면서 양피지는 문서 표기의 유일한 소재였습니다. 유럽 역시 오래전부터 종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종이가 흘러들어온 것은 십자군 전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그런이유로 유용성을 알면서도 이교도의 것이라고 생각되어 한동안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접한 지역부터 서서히 생각을 담아야 하는 금단의 매력에 넘어가기 시작하여 1056년(서지학 개척자 다드 헌터는 1151년) 스페인에 제지 공장이 세워졌으며, 1235년 이탈리아, 1348년 프랑스, 1391년 독일, 1411년 스위스에 제지 공장이 세워졌습니다.

   
  메흐멧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 출처 위키백과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성안에는 콘스탄티누스 11세를 비롯하여 7,000명의 군사와 5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술탄의 군사는 10만에 육박하거나 그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날 술탄은 총공격으로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차, 2차 이어진 3차 공격은 술탄의 최정예부대이자 가장 강력한 부대인 예니체리군단의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제노바 용병대장이 큰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실려나가자 용병들의 전열이 무너졌고, 이틈을 놓치지 않고 예니체리군단 들어와 성벽탑에 오스만 제국 깃발을 꽂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자 방어선이 급격히 무너졌고 성문이 열리자 오스만 제국군은 물밀듯 밀려들어왔습니다. 천년 넘게 그리스-로마 문화를 간직해온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입니다.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그들의 지식과 문서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등장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와 합쳐져 종이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 폭발력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1491년 폴란드, 1494년 잉글랜드, 1546년 헝가리, 1576년 러시아, 1586년 네덜란드에 제지 공장이 세워지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종이가 좋아하는 것은 열정, 지식, 문명, 과학, 문학, 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인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방안을 둘러 보세요. 당신은 종이에 어떤 존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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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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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준 (223.XXX.XXX.70)
디지털 시대에 살고있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이로 보관하는, 종이는 그런 존재이죠^^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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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6 06: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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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현 (39.XXX.XXX.49)
어제 은행에 들러 카드를 재발급받았는데 모든 것이 전자화되어 있어서 기존에 서류로 하던 일을 다 전자화시켰더군요. 종이를 사용하는 것보다 전자기기로 일처리하는것이 더 저비용이고 효율적인 것 같다고 은행에서는 생각한걸까요? 유독 대한민국이 전산화가 선진적으로 대중화된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기기만큼은 아니지만, 종이는 여전히 그 다음가는 여전히 편리하고 효율적인 저장도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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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5 13: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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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아마도 관성과 편리함 그리고 진본에 대한 확신과 경쟁이 계속 될 것 같고요 이 승부는 우리 세대에 끝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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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6 05: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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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욱 (112.XXX.XXX.86)
인간에게 역사를 물려 준 종이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움직여 종교를 알게 해주고 역사를 알게 해 주었다고 하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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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3 13: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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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네. 맞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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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5 07: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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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211.XXX.XXX.212)
슬픈 일이지만 종교와 전쟁은 큰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라는 걸 새삼 실감합니다. 인쇄된 책을 지우고 새로운 내용을 적는다는 건 요즘처럼 종이가 흔한 세상에선 보기 어려운 광경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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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3 13: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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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음. 어찌보면 컴퓨터에서 쓸모 없는 것을 지우는 것과 비슷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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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5 07: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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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와종이 (175.XXX.XXX.94)
찰나의 생각이 날 때마다 수첩에 손이 간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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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3 09:5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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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메모하는 모습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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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5 07:5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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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106.XXX.XXX.37)
결국 종이는 인간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군요. 수요의 힘은 사상을 넘어서는 것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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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3 09: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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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어떤 계기가 됐던 인간의 욕망이 세상을 바꾸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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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5 07:5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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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118.XXX.XXX.87)
값싸게 쓸 수 있는 종이 덕분에 교육의 기회도 넓어지고 생각을 자유롭게 나타낼 수도 있게 되었네요.
종이가 생각하는 인간을 좋아한다는 말을 되세기며, 오늘 든 생각을 종이에 차분이 정리해봐야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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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3 08: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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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21.XXX.XXX.38)
지금은 어떤 시대 일까요 전기가 종이를 밀어내고 있는 시대 일까요? 종이가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인류와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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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4 15: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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