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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의 전쟁과 예술가들
허찬국 2022년 03월 21일 (월) 00:00:01

20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 서쪽 유럽에서 국가 간 전쟁은 없었습니다. 특히 동서 냉전 종식 이후 인적·물적 교류가 긴밀해져 전쟁은 그야말로 기우(杞憂)였지요. 하지만 2월 24일 러시아의 푸틴은 유태계인 젤렌스키가 대통령인 이웃 우크라이나의 나치 세력이 러시아인들을 학살한다는 허황된 구실을 내세워 침공했습니다. 19세기 제국주의적 전쟁의 인도적 참상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분야도 전쟁의 유탄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중 두 슬라브계 오페라 가수의 엇갈린 처지는 대하소설이나 고전 비극을 연상시킵니다. 주인공 안나 네트렙코(소프라노)와 엘리나 가랑차(메조소프라노)는 1970년대(각각 1971년과 1976년) 당시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소련이 붕괴하며 네트렙코는 러시아, 가랑차는 라트비아 사람이 되지요.

이들을 유튜브 영상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네트렙코의 2008년 앨범 ‘Souvenirs’에 수록된 ‘호프만의 뱃노래’(오펜바흐의 곡, barcalolle) 녹음 실황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감미로운 곡을 부르는 풋풋한 모습의 두 성악가의 화음, 프라하 필하모니아의 반주와 합창에 감탄이 나옵니다. 약 1,470만이나 되는 조회 수가 인기를 짐작케 합니다. 두 사람이 공연장 이중창 영상들도 여럿 있지만 이 뱃노래 영상만큼 조회 수가 높지 않습니다. 그 이후 두 소프라노는 모두 세계 주요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스타 성악가가 되었지요.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서방 예술계의 강력한 반발에 두 사람의 처지가 갈리고 있습니다. 가랑차는 전쟁 발발 직후 인스타그램을 통해 러시아의 침공과 이를 감행한 푸틴 정권을 비판하며 러시아에서의 공연을 취소했고, 향후 침공 지지자들과 공연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침략과 점령이 무엇인지를 아는 라트비아 시민으로서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자유를 지지한다는 확실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소련 치하에 있었던 라트비아는 이제 서방 군사동맹 NATO 회원국으로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지요.

네트렙코는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국적도 취득했지만 그간 푸틴 정부와 가까운 행보를 보여 왔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 전쟁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푸틴 지지 철회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Met)가 최근 푸틴을 지지하는 음악가들을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 호프만의 뱃노래를 부르는 가랑차(좌)와 네트렙코(우). (유튜브 캡쳐)
(2) 네트렙코가 주연, 게르기에프의 지휘로 챠이콥스키 오페라 ‘Iolanta’ Met 공연 후 커튼 콜 무대에 올라 이들의 푸틴 지지를 항의하는 포스터를 펼친 한 남자 (2015.1.29. 유튜브 캡쳐)
 

영미 언론 보도에 따르면 네트렙코는 2002년 프로코피에프의 오페라 ‘전쟁과 평화’로 Met에 데뷔한 후로 192회나 그 무대에 섰고, 올해에도 두 편의 오페라 출연이 예정되었었다고 합니다. Met는 4월로 예정된 푸치니의 ‘투란도트’ 공연에 네트렙코 대신 우크라이나 출신 류드밀라 모나스티르스카를 기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서방 유럽에서 예정되었던 그녀의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었습니다.

네트렙코와 인연이 깊은 러시아의 대표적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초유의 냉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래전 가난한 성악가 지망생 네트렙코를 모스크바에서 처음 발굴하여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러시아의 마린스키극장 예술감독 및 총감독으로 재직하는 동시에 유럽의 주요 관현악단의 지휘자와 음악제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게르기에프는 푸틴의 어용 나팔수였습니다. 일례로 시리아 독재자 아사드를 지원하기 위해 내전에 참전한 러시아 군은 곳곳에서 무차별하게 민간인 주거지와 시설을 공격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대규모 시리아 피란민들이 유럽을 향하며 유럽의 난민 위기가 이어졌지요. 2016년 러시아와 시리아 군이 고대 유적지이며 반군 거점 팔미라를 점령하자 게르기에프는 그곳에서 승전기념 연주회를 개최했습니다.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푸틴의 사주를 받은 친(親)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무력 분쟁을 이어오며 이번 침공의 구실을 제공했습니다. 게르기에프는 공공연히 이들을 지지했고 네트렙코도 연루되어 있습니다. 몇 주 전 게르기에프가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던 독일의 뮌헨 필하모닉은 푸틴과 절연하기를 거부한 그를 파면했고, 이를 시작으로 유럽의 주요 연주 단체들도 해임, 해촉하며 그는 서방에서 완전히 퇴출되었습니다.

필자가 가랑차를 처음 본 것은 2010년 2월에 있었던 드레스덴 공습 기념 추모음악회의 베토벤 ‘장엄미사’ 공연 영상에서였습니다(2020. 2. 14 자유칼럼, ‘드레스덴 공습과 박수 없는 2월 연주회’ 참조). 4명의 독창자 중 1인이었던 가랑차의 메조소프라노 목소리는 베토벤 음악의 장엄미를 더욱 짙게 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달 14일 뉴욕에서 Met가 개최한 우크라이나를 위한 음악회에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연주되었습니다. 조만간 우크라이나가 자유와 평화를 다시 찾아 슬픔과 결의가 아니라, 기쁨에 찬 ‘환희의 송가’가 키이우에서 울려 퍼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무고한 희생자들을 위한 ‘장엄미사’도 필요할 것입니다.

자신의 영역에 몰두해야 할 예술가들을 피에 물든 진흙탕으로 끌어 내리는 폐쇄된 사회와 독재자들은 강력히 배척되어야 합니다.

호프만의 뱃노래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0u0M4CMq7uI&list=RD0u0M4CMq7uI&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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