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_(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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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방석순

2008년 04월 21일 (월) 05:27:46

“예쁘게 깎아 주세요. 선보러 가야 하니까.”
“네에.”
가끔 들르는 미용실, 아니 헤어샵의 미용사, 아니 헤어디자이너는 별로 말이 없는 편입니다. 간단히 물을 것 묻고 답할 것 답하는 정도. 그래도 서리 내린 머리를 들이밀며 하는 말에 싱긋 웃습니다. 웬 전에 없던 농담을? 그런 눈칩니다.

단골 이발사가 멀리 옮겨간 후로는 가까운 헤어샵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예전 같으면 남정네가 미장원 근처에 얼씬거리다간 망신당하기 십상인데. 어찌된 게 요즘은 사내 손님이 더 많아 보입니다.

처음이라 그런지 모든 순서가 뒤죽박죽입니다. 이발도 한 주일 벼르다가 때를 놓치고 상견례를 마친 다음날에야 하게 됐으니 기실은 싱거운 농을 한 셈입니다.

어느 날 아들아이가 불쑥 내질렀습니다.
“내 결혼엔 모두들 관심도 없나봐!”
아내도 나도 화들짝 놀랐습니다.
“얘, 이리 앉아봐라. 이놈아, 엄마 아빠가 그것 말고 달리 신경 쓸 일이 뭐 있겠니?”

회사에서 그리던 솜씬지 녀석은 화이트보드에다 혼례 준비사항을 그럴 듯하게 그려갔습니다. 덧붙일 것도 없어 내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러니 혼례 날짜 잡아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런데 그보다 장소부터 알아봐야겠더라. 친구 하나가 반년 전 신청한 날짜에 사람들이 몰려 25대 1로 제비를 뽑았다는구나.”

저희 엄마가 좋은 날 고른다며 이리저리 알아보는 사이 녀석은 벌써 장모될 분이 몇 개의 길일을 골라 놓았다며 동의를 구해 왔습니다.
“응, 너희만 좋다면 그만이지. 어서 장소나 알아봐라.”

이튿날 바로 아들은 강남구청 근처 성당에 예약을 마쳤노라고 통보해왔습니다. 이젠 더 이상 묻고 자시고 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밀고 당기고 씨름은 않더라도 뭘 좀 묻고 따져보기는커녕 기웃거릴 겨를도 없이 모든 게 결정되고 만 것입니다.

당황? 시원섭섭? 허전? 어느 게 상황에 맞는 기분인지 얼떨떨할 뿐입니다. 알아서 하는 아이들이 대견한 것도 같고, 당돌한 것도 같고.
“날짜까지 잡았으니 서로 얼굴이라도 봐야지.”
뒤늦게 상견례 날짜와 장소도 잡았습니다.

‘이거 온통 뒤죽박죽이네. 아니, 녀석들이 먼저 꿇어앉아서 아버님 어머님,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 다 컸으니 결혼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런 다음 길게 훈계 좀 듣고, 양가 어른들 모셔서 인사 나누고, 그 다음에 혼례 날짜를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어느 새 그런 절차는 물 건너갔습니다. 그래도 훈계 한마디쯤은 있어야겠지 싶어 상견례 사흘 전에야 둘을 불러 앉혔습니다. “이건 상의가 아니고 훈계다” 하고선 30여년 묵은 부부생활의 노하우를 귀띔해 주었습니다.

“너희도 앞으론 사랑이 아니라 생활이다. 우리 부부는 그동안 너무 많이 싸웠다.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 생각이 사랑한다고 하루아침에 같아지겠니. 무슨 일에서건 자기주장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이해, 배려와 격려가 중요하다. 그걸 깨우치니 싸울 일이 없더구나. 요즘은 옛날 연애하던 기분으로 산다.”

싸움은 코피 터지게 하더라도 그날로 끝낼 것, 어떤 경우라도 베개 들고 잠자리를 옮겨 다니지 말 것, 보따리 들고 나가는 일은 결단코 하지 말 것... 둘에겐 다소 지루했겠지만 그래 놓으니 비로소 부모 구실을 조금치라도 해낸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상견례엔 아들보다 더 설레는 마음으로 나갔습니다. 의외로 푸근한 분위기였습니다. 우리 자식 예쁘게 보아주어 감사하다, 서로 아들 딸 삼자며 축배를 들었습니다. 고향 얘기도 나오고 세상사는 얘기도 늘어놓았습니다. 첫 상면의 예를 무시한다면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여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히트는 아내의 마지막 한마디였습니다.
“전 계모처럼 키워서 아들에 대한 집착은 전혀 없답니다. 그러니 따님 시집살이 걱정일랑 아예 접으세요.”

무뚝뚝한 아들 하나 달랑 키우며 늘 섭섭해 하다가 그날은 참 푸짐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절차에 대한 아쉬움 따윈 까맣게 사라졌고. 서로 아들 딸 얻은 기쁨, 함께 술잔을 부딪쳐도 좋을 벗을 얻었다는 기쁨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내 흐뭇했습니다. 아이들의 사귐이 이렇게 해서 양가의 결연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이게 보통 일입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