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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과 치매 사이
방석순 2021년 11월 10일 (수) 00:01:11

건망증과 치매를 구분하는 손쉬운 방법이 있답니다. 일 보고 바지 지퍼 안 올리면 건망증, 지퍼를 안 내리고 일을 보면 치매! 그러나 때때로 건망증인지 치매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도 적지 않게 벌어지곤 합니다.

마누라는 무슨 얘기 하다가 제가 “그랬었나?” 하고 대꾸하면 대뜸 “당신 요즘 좀 이상해요!” 하고 치매 증상으로 몰아갑니다. 걱정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핀잔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소리를 듣고 나면 한동안 언짢은 기분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억이 때로는 새하얗게 때로는 새까맣게 잊혀서 아무 생각도 안 나니 큰일입니다.

#1
문간에 '가스 확인, 소등, 휴대폰…' 줄줄이 써 놓고도 까먹고 다니기 일쑵니다. 지난해부터는 하나 더 늘었습니다. ‘마스크’, 코로나가 준 달갑잖은 선물입니다.

오늘은 마누라가 먼저 집을 나섭니다. 혹시 싶어서 "핸드폰? 마스크?" 했더니 씩 웃으며 그냥 나갑니다. 다 챙겼다는 뜻이겠지요. 나도 집을 나섰습니다. ‘오늘 띠라 차가 늦네’ 하고 구시렁거리는데 마침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버스 문이 열리는 순간 ‘아차, 마스크!’ "아이구, 미안해요!" 버스 기사에게 어서 가시라 손짓해 오래 기다린 버스를 그냥 보내고는 집으로 돌아섭니다. '애고, 이래서 오늘은 꼼짝없이 지각이네!'

#2
마누라가 출타하고 혼자 집에 있던 날입니다. ‘오늘 점수 좀 따볼까?’ 하고 차 키를 들고 나섰습니다. 마침 세탁소에 맡긴 양복저고리가 생각났습니다. 겨우 한두 번 입었던 옷, 세탁비가 아깝지만 제때 세탁 않고 그냥 옷장에 박아두기는 찜찜해서~ 옷을 찾아 자동차 뒷자리에 놓고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마누라가 정해 놓은 단골 가게서 수정된 달걀도 사고, 간식용 빵도 한 봉지 사고, 마침 싱싱한 오렌지가 눈에 띄어 또 한 봉지 사고…

무사히 집에 돌아와 주차 공간도 제때 찾아냈으니 오늘은 여러모로 운이 좋은 날입니다. 차 뒷자리 장을 본 물건 위에 구겨질까 봐 얹어 놓았던 양복저고리를 먼저 꺼냈더니 잠시 둘 데가 마땅찮습니다. 때마침 옆에 세워 놓은 소형 트럭의 백미러가 옷걸이로 제격이다 싶었습니다. 일단 옷을 걸어 두고 사 온 물건들을 챙겨 들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방에 느긋이 앉았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동드릴을 좀 빌려 달랍니다. 집 안에서 키우는 고양이를 밖에서도 살펴볼 수 있게 카메라를 설치한다나요. 까다로운 녀석이라 마스크 단단히 챙겨 쓰고, 드릴 박스 들고, 차 키를 챙겨 나갔습니다. 주차장에 갔더니 제 차 옆 트럭 백미러에 그때까지 양복저고리가 걸려 있었습니다. ‘하이고, 아들 아니었으면 양복저고리 하나 날릴 뻔했네!’

#3
손오공’ 하면 모르는 친구가 없습니다. 고교 시절 공포의 대상. "한 대 맞을래? 정학 맞을래?" 교실 뒤뜰에서,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다 선생님에게 걸려 훅 얻어맞은 놈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아득히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만큼 정이 쌓여 제자들 틈에 끼어서도 스스럼이 없는 분입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나, 김광호야" 하고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선생님 별호가 뭐였더라,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생각나질 않습니다. 참 별일입니다. '김광호' 하면 얼른 못 알아들어도 '손오공' 하면 "네, 선생님!" 소리가 절로 나왔었는데. 불경스럽게 저팔계, 원숭이까지 접근했는데도 정작 별호는 깜깜입니다. 통화가 끝난 뒤 혼잣소리로 끙끙거렸더니 곁에 있던 마누라가 "손오공!" 하고 일깨워줍니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몇 번 허둥거려 간신히 우려낸 꽃차. 곁들인 과자는 마누라 작품.

#4
책상머리에 앉았다가 갑자기 차 한잔 생각이 났습니다. ‘우선 물부터 끓여야지’ 하고 주전자 물을 가스스토브(레인지?)에 올려놓았습니다. 잠시의 무료를 못 참아 인터넷을 뒤적이고 있다가 아차 싶어 뛰어갔더니 웬걸, 그새 물이 다 마르고 주전자는 화로처럼 뜨거워져 있습니다. 그대로 찬물을 부었다간 터질 것 같아 또 한참 기다려서 다시 물을 끓였습니다.

100도로 충분히 끓었으니 이젠 80도 정도로 물 온도를 낮출 차례입니다. 그런데 또 그새를 못 참아 책을 뒤적거리다 이번엔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 버렸습니다. 다시 끓이고 식히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난 후에야 냉장고 문짝에 붙여 둔 타이머가 생각났습니다. ‘아이고, 이걸 머리라고…’

산이 너무 좋아 법대 산악과를 나왔다며 주말 산행을 앞장서 이끄는 친구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법조문을 줄줄 외고 다녔을 그가 요즘 “야, 책 읽으면 앞장이 아니라 바로 윗줄이 생각나질 않아!” 해서 친구들을 웃기곤 합니다.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집니다. 나이 탓인지 전보다 기억력이 엉망으로 부실해졌습니다. 주의가 더욱 산만해진 탓도 큰 것 같습니다. 무슨 일에든 잡생각이 끼어듭니다. 책을 읽다가도 어, 이 대목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는 엉뚱한 생각에 건성으로 페이지를 넘길 뿐 상념은 엉뚱한 곳을 헤매곤 합니다. 무얼 해도 연관된 다른 일이 떠오르거나 전혀 상관도 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들쑤시고 다녀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습니다.

또 한편 무엇이든 진득이 기다리지 못하는 조바심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 글을 읽으면 책에만 집중해야 할 텐데 잠시를 못 버티고 다른 데로 신경을 돌리니 이쪽도 저쪽도 불안한 상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직도 멀었다. 나이 들수록 느긋해져야 할 텐데 거꾸로 날이 갈수록 더 조바심을 내다니!’ 그렇게 자책하며 건망증 너머 호시탐탐 허술한 틈을 노리고 있을 치매의 침입에 전의를 가다듬어 봅니다.

현재 우리나라 5,160여만 인구 중 17%가 65세 이상 노인입니다. 나이 드는 만큼 많아지게 마련인 치매환자 수는 2010년 약 25만 명에서 10년 사이 거의 90만 명으로 늘었답니다. 앞으로 4~5년 내 인구 5명 중 1명이 노인인 초고령사회가 된다니 치매 노인도 더욱 늘어나겠지요. 가정이나 사회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한 설문조사에서 치매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95.7%,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이 정신적·신체적 한계에 시달린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피로와 스트레스로 환자 살해나 자살충동 등 극단적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도 30%라니 끔찍한 생각이 듭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가족과 사회를 위해서 정말 심신의 건강을 잘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미당(未堂 徐廷柱; 1915~ 2000)은 생전에 치매 예방을 위해 산 이름을 외웠다고 하지요. 그 흉내를 내어 저는 주말마다 산을 오르내리며 입속으로 옛시조들을 읊조려 보곤 합니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히냐/ 엇더타 능연각(凌煙閣) 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김종서(金宗瑞; 1383~1453)

*엇더타 [감탄사] ‘회한’, ‘아쉬움’ 따위를 나타낼 때 쓰던 옛말.
*능연각(凌煙閣) [명사] 중국 당나라 때 개국 공신 24명의 초상을 그려 걸었던 누각.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가 이를 본보기로 장생전(長生殿)을 세워 공신의 도상(圖像)을 보관케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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