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이성낙 이런생각
     
남기고 싶은 화장실 이야기
이성낙 2021년 11월 04일 (목) 00:00:17

1988년 초, 신년 인사차 고(故) 방우영(1928~2016) 회장을 조선일보사 회장실로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공중화장실 문제가 크게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필자가 “국가적 행사인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공중화장실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커서 이처럼 사회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방 회장은 제 이야기를 경청하셨습니다. 필자는 “현시점에서 새로운 공중화장실을 확보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충분치 않고, 예산이 있다 하여도 화장실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부지 확보도 어렵고 설령 부지를 확보한다 해도 지역주민의 민원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해결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서울올림픽을 맞아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나 많은 외국인 방문객이 서울을 찾을 텐데 그들이 이용할 공중화장실이 없다면 대단히 곤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해결책으로 시내 큰 빌딩의 화장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면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필자의 생각을 묵묵히 듣고 있던 방 회장은 그 자리에서 ‘사회부 부장’을 불렀습니다. 사회부장이 오자, 방 회장은 제 생각을 다시 한 번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필자는 거듭 서울 시내 빌딩 화장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방안을 언급하였습니다. 며칠 후 조선일보에는 신용석 사회부장의 데스크 칼럼 ‘올림픽 화장실’이 실렸습니다(1988.1.21). 뒤이어, 시내 대형빌딩의 화장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조치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96년 무렵, 필자가 재직하던 아주대학교 의료원장실로 심재덕(沈載德, 1939~2009, 재임 1995~2002) 수원시장이 찾아왔습니다. 차향을 즐기며 잠시 환담하다가, 심재덕 시장이 뜬금없이 “혹시 수원시 행정에 개선할 사항이나 시 행정에 참고될 사안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국내 화장실은 개선의 여지가 많다”,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심 시장은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메모지에 무엇인가 적었습니다.

2~3년 후, 수원시가 공중화장실 개선사업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전국적으로 ‘공중화장실 미화 캠페인’이 전개된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캠페인이 가져온 뚜렷한 변화 중 하나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의 놀랍고 ‘우아한' 탈바꿈입니다. 심재덕 시장은 해마다 전국적으로 ‘아름다운 화장실 경연대회’를 열어 국내 화장실의 질적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나아가, 심 시장은 세계화장실협회(World Toilet Association)를 창립하고 인류의 보건 위생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더 많은 사람에게 화장실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수원 집터에 해우재(解憂齋)박물관을 건립했습니다. 청결하고 깔끔한 화장실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을 느끼게 됩니다. 심 시장은 그 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약하다가 2009년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공중화장실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것입니다. 선진국의 공중화장실이 ‘희귀 시설’임을 통감하고 나면, 우리의 공중화장실이 얼마나 멋지고, 수적으로도 많은지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조선일보의 김태훈 논설위원이 우리의 주거환경 가운데 “한강의 기적이 화장실에서도 이뤄진 셈이다.[조선일보 '만물상', <경복궁 수세식 화장실> (2021.7.12.)] ”라고 지적하였듯이 우리는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기적을 ‘공중화장실’에서 이룩해냈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 사회의 힘, 순발력과 결집력을 보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조선일보에서 시작된 ‘작은 생각’이 심재덕 전 시장의 화장실 환경개선 사업으로 이어지며 발전을 거듭하였고 이제, 우리의 화장실 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가 부러워하며 본보기로 삼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위생 선진국’으로 크게 도약한 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에서 당연시된 청결하고도 멋진 공중화장실이 뒷받침하여준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의 한 모서리인 ‘뒷간’이 밝고 아름다움을 발하는 곳으로 변모한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니 우리의 화장실 문화가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남기고 싶은 당당한 역사의 일편(一片)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5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유덕상 (211.XXX.XXX.121)
이박사님 글 잘 읽었습니다. 박사님의 남다른 통찰력과 혜안에 박수를 보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이후 환경부지사 재임시절(2006~2009) 심재덕 회장님의 화장실문화 선진화에 대한 열정과 헌신에 감동을 받았었는데, 알고보니 이박사님이 그 원조시란 걸 알고서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유럽여행시 공중화장실 이용의 불편을 겪어보신 분들은 모두 우리나라 공중화장실 수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우리 모두 고맙게도 이박사님에게 큰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
01036699090
답변달기
2021-11-09 18:28:13
0 0
Sungnack1212 (14.XXX.XXX.53)
과분한 과찬이십니다.
고 심재홍 시장님의 불같은 실천력이 99.999 %입니다.
답변달기
2021-11-26 23:31:31
0 0
한세상 (112.XXX.XXX.252)
건물 화장실을 일반인에게 열어주는 것! 그것이 총장님 머리에서 나왔군요. 정말 세상을 바꾸는 발상이었습니다.
답변달기
2021-11-05 09:00:01
0 0
Sungnack1212 (14.XXX.XXX.53)
궁한 처지가 안타까웠습니다.
답변달기
2021-11-26 23:33:07
0 0
Sungnack1212 (14.XXX.XXX.53)
고맙습니다.
작은 생각이었습니다.
답변달기
2021-11-05 11:44:21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