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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은 생명, 젖, 사랑입니다(1)
노경아 2021년 11월 03일 (수) 00:02:06

“이마가 나오면서 귀 빠진 세상 첫날/폭염보다 무덥고 지독한 산통 끝에/ 겨운 몸 일으켜 앉아/ 첫국밥을 먹는다// 생일날 찰밥을 먹어야 덕이 있다고/ 삼신할매 지앙밥에 몸 풀고 다시 살아/ 고래도 새끼 낳으면/ 미역밭 찾아간다// 땀나고 터진 입술에 뼛속까지 헛헛한/ 첫국밥 한 사발에 허리 펴고 젖이 돌아/ 단전에 힘 들어가고/ 미루었던 잠을 잔다”

옥영숙의 시 ‘첫국밥’입니다. ‘첫국밥’ 하면 ‘탄생’ ‘생명’ ‘젖’이 떠오릅니다. 첫국밥은 아이를 낳은 뒤에 산모가 처음으로 먹는 국과 밥, 즉 미역국과 흰밥을 뜻합니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풍습을 기록한 이능화의 ‘조선여속고’에도 첫국밥 이야기가 나옵니다.

“임신부가 해산하면 민가에서 짚자리, 기저귀, 쌀, 미역을 장만해 놓고 첫국밥을 먹기 전에 산모 방의 남서쪽을 깨끗이 치운 뒤, 쌀밥과 미역국을 세 그릇씩 장만해 삼신(三神)상을 차려 바쳤는데, 여기에 놓았던 밥과 국을 산모가 모두 먹었다.” 귀한 아기를 점지하고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잘 키우고 순산시켜 준 삼신할머니를 위해 쌀밥과 미역국으로 정성껏 삼신상을 차리는 조상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우리에게 미역은 예나 지금이나 참 각별합니다. 집안에 임신부가 있으면 미리 미역을 준비하지요. 임신부가 몸을 풀고 나서 먹을 미역은 절대 값을 깎지 않습니다. 상인들은 미역의 중간을 자르거나 꺾지도 않습니다. 값을 깎으면 아기의 수명이 짧아지고 미역의 중간을 꺾으면 산모가 난산한다는 속설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미역은 생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25년 전 겨울 첫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는 소고기 미역국에 밥을 말아 떠 먹여주며 “지금부터 먹는 밥은 다 젖이 되는겨. 무통주사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도 애기를 생각해 팍팍 먹어야 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50여 년 전 4킬로그램이 넘는 나를 낳느라, 세상의 빛이 꺼지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너무도 아파서 눈앞이 캄캄해졌을 때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답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엄마가 내뱉은 첫 마디는 “달우(우리 큰오빠 이름) 아부지, 정전이유? 애는 어뗘유, 손가락 발가락 다 괜찮쥬?”였다네요.

“그날 니덜 아부지가 끓여준 첫국밥이 어찌나 맛나던지, 단숨에 다 먹었지 뭐여. 그러고 나니 머리카락이 수북하고 살이 올라 뽀얀 애기 얼굴이 보이더라. 갓난애 같지가 않았어. 지금도 그 미역국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미역국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생일에도 “미역국 말고 니덜 좋아하는 올갱이(다슬기의 충청도 방언) 삶아서 호박, 부추, 아욱 넣고 끓여 먹자”고 합니다. 자상했던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을 흘릴까 봐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20년 넘게 엄마 생신엔 된장을 풀어 끓인 올갱잇국을 먹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이달엔 구수한 미역국 냄새를 맡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수험생이 있는 집에선 가족의 생일이 있어도 미역국을 끓이지 않을 테니까요. 시험에 떨어지거나 직장을 잃었을 때 '미역국 먹었다'라고 표현하잖아요. 이는 일제강점기 때 나온 말입니다. 당시 일본이 우리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을 때, ‘해산(解散)’이 임신부가 몸을 푼다는 ‘해산(解産)’과 발음이 같아 나온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미역국에 대한 편견은 떨쳐버려도 좋을 듯싶습니다. 지난해 수능이 끝난 후 한 수험생이 쓴 글은 많은 의미를 던집니다. “수능 날 아침 엄마가 미역국 해주심. 엄마한테 화내려고 했는데 엄마가 ‘수능 못 쳐도 니가 못해서 못 친 게 아니라 엄마가 미역국 해줘서 망친 거라고 생각해’라고 말씀하심. 아침밥 먹다가 울었음. 수능장 입구에서 큰절하고 시험 잘 치르고 원하는 대학 붙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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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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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3 (1.XXX.XXX.85)
38년 전 마흔 아홉에 일찌감치 이 세상 떠나가신 아부지를 추억하며 思父曲 짧은 글 적어가다가 경아 님의 애정어린 글 다시 읽었습니다.
내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그 미역 값 깎지 않으셨을텐데 울 아버지는 마흔아홉에 그만...
38년 전 저를 두고 가신 아부지를 그리다가 그리움에 젖어 댓글 남깁니다.
아름다운 가을을 님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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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8 02:16:26
0 0
노경아 (116.XXX.XXX.129)
'아부지'라는 단어에서 그리움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일찍 떠나신 아부지와의 추억이 너무도 짧아 더 아픈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서울역 근처 미역국 전문점에서 조개미역국 한 뚝배기 먹고 출근했습니다. 구수하고 뜨끈한 국물 덕에 몸도 마음도 가볍게 앉아 일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도 아름다운 가을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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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8 16:47:40
0 0
정병용 (220.XXX.XXX.57)
미역국에 대한 새롭고 많은 지식 감사합니다.
미역국이 그런 여러가지 의미가 있군요- ㅎㅎ
위 Column에서 노경아님의 50년전에 세상에 태어낫으니 지금이 50이라
좋은때 입니다. 항상즐겁고 긍정적이고,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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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3 10:48:48
2 0
노경아 (116.XXX.XXX.129)
선생님의 응원에 늘 힘이 납니다. 50여 년 전 우량아 대회에 출전해도 될 만큼 덩치가 좋았다는데, 지금은 제 아이의 절반도 안 되는 작은 체구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ㅎㅎㅎㅎ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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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4 11:06:11
1 0
임성빈 (117.XXX.XXX.24)
강원도 근무하던 시절에, 강릉 상갓집엘 가니 서울 상갓집에서는 흔한 육개장 대신에 미역국을 주더군요. 의아해했지만 다시 태어나라(멋진 환생, 영생)는 의미이거니 하고 자체 해석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解散의 의미로 미역국 먹었다라는 의미가 씌였다는 웃픈 지식 얻어 갑니다.

제목에 (1)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니 조만간 (2)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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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3 08:23:02
2 0
노경아 (116.XXX.XXX.129)
부사장님, 강원도 상갓집 미역국 이야기에 관심이 갑니다. '멋진 환생'이란 의미에도 눈이 확 떠집니다. 다음 달엔 강원도 이야기를 시작으로 전국의 재미있는 미역국 이야기를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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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4 11:09:01
1 0
임성빈 (203.XXX.XXX.45)
벌써 기대가 확 됩니다.

어렸을 적에 미역국은 소고기미역국이 유일한지 알았습니다만
닭고기, 맨미역, 바지락, 조개, 우럭, 성게 등등 종류가 매우 많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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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7 07:56:4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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