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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준의 <교향곡 2번>을 관람하고
권오숙 2021년 10월 27일 (수) 02:07:13

세상에는 셰익스피어 작품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클래식 명곡이 꽤 많습니다. 짤막한 서곡에서부터 극음악, 교향시, 발레곡, 합창곡, 장대한 규모의 오페라까지 장르도, 규모도 다양합니다. 클래식 음악의 문외한인 필자의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것들만 해도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 (여기에 결혼식장에서 흔히 듣는 ‘결혼 행진곡’이 수록되어 있지요.), 베르디의 오페라 <오셀로>, <맥베스>, <폴스타프>, 프로코피에프의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작곡가 류재준은 이런 리스트에 중요한 작품 하나를 추가하였습니다. 그건 바로 지난 10월 23일 서울국제음악제의 개막 공연에서 연주된 그의 <교향곡 2번>입니다. 총 4악장으로 구성된 70여 분짜리 장대한 규모의 이 합창 교향곡은 셰익스피어 소네트 33번과 60번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지난여름 필자가 셰익스피어 소네트에 대한 자문 요청으로 류재준 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셰익스피어가 흑사병으로 극장 공연이 중지된 상황에서 소네트들을 지었다는 데서 이 곡의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관련 칼럼 '셰익스피어가 맺어준 뜻밖의 인연', 21년 2월 16일자 참조). 더 정확히 말하면 소네트는 1593년-1598년 사이에 걸쳐 쓴 것이고, 극장이 문을 닫았던 역병 동안에는 장편 설화시인 『비너스와 아도니스』 (Venus and Adonis) 와 『루크레스의 강간』 (The Rape of Lucrece)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교향곡의 2악장에 삽입된 소네트 60번과 4악장에 삽입된 소네트 33번은 모두 시간의 파괴적 힘과 젊음의 찰나성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60번 소네트의 결구(結句)에서는 그런 인생의 덧없음을 극복하는 시(詩), 즉 예술의 힘을 노래합니다. 흑사병의 대유행을 겪었던 셰익스피어가 시를 통해 삶의 유한성과 찰나성을 극복하려 했던 것같이 류재준은 이 교향곡을 통해 코로나 19의 희생자들의 안식을 기원하고 팬데믹으로 일상을 상실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

공연 전 합창 리허설이 진행될 때 필자는 솔리스트들과 합창단원의 발음을 점검하기 위해 참관하였습니다. 당시는 몰랐지만 국내 최고 성악가들(임선혜, 이명주, 김정미, 국윤종, 사무엘 윤)과 합창단원들(국립합창단, 수원시립합창단),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노장 음악가인 지휘자 랄프 고토니(75)와의 작업이었습니다. 일정상 따로 작업을 해야 했던 바리톤 사무엘 윤은 이 공연이 ‘스타워즈’라고 하였습니다. 클래식계의 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음을 표현한 우스갯소리였습니다. 비록 필자의 역할은 한없이 미약한 것이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일. 공교롭게도 그날 셰익스피어학회의 가을 학술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학회의 여러 중요 행사 때문에 연주회에 도저히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필자의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역사적 순간을 놓칠 수는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 곡이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바탕으로 한 세계 최초의 교향곡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학술대회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필자가 진행해야 할 부분을 사전에 동영상으로 촬영하고는 공연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호른 연주자 6명, 바이올린 파트에 26명, 퍼커션도 6대나 된다. 아주 두텁고 풍성한 사운드를 구사한다. 두 번째 악장에서 합창단과 5명의 솔리스트들이 노래하는데, 파도가 점점 거대한 폭풍으로 몰아치는 장면을 만날 수 있다.”라는 랄프 고토니의 주장처럼 오케스트라와 합창대의 규모와 연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경향신문, 10월 21일자 기사 “‘류재준 교향곡 2번’은 거대한 작품”)

거기다 합창에 맞춰 대형 스크린에 나타나는 셰익스피어 소네트 한 소절 한 소절까지. 모든 것이 숭고한 경험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벅차고 숨이 막혀왔습니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오랜 기립박수가 이어졌습니다. 필자는 그 누구도 경험해본 적 없었던 무서운 팬데믹의 고통이 예술로 승화되는 현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소네트 60번에서 노래한 것이 바로 예술의 그런 놀라운 힘입니다. 그 누구도 시간의 낫질 피할 자 없지만 아름다운 시 속에, 그림 속에, 음악 속에서 인생의 빛나는 순간은 불멸합니다. 대형스크린에 함께 올라갔던 필자의 부족한 번역으로 소네트 60번을 소개하며 소감을 마칠까 합니다.

소네트 60번
조약돌 해안으로 파도가 밀려가듯
우리의 매 순간도 끝을 향해 달려간다.
모두들 앞선 것들과 자리를 바꾸며
계속 수고스레 앞을 다툰다.
한때 빛을 한껏 받고 태어나
서서히 성인이 되고 인생의 절정기에 이르면
심술궂은 일식이 그의 영광 잠식한다.
그렇게 시간은 자기가 준 선물 스스로 망친다.
시간은 젊음에 부과했던 영광 얼어붙게 하니
미인의 이마에 주름 새기고
자연의 진귀한 보물 먹어치우고
시간의 낫질 피할 자 하나 없다.
허나 시간이 흘러도 내 시에 희망 있노라.
시간의 잔인한 손길에도 불구하고 그대 가치 찬양하리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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