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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여자 신드롬
권오숙 2021년 09월 27일 (월) 00:02:22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문화에 두드러진 경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한 여자 신드롬입니다. 이미 20세기 후반부에 불었던 페미니즘 이론 광풍은 이제 다소 잠잠해지고,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진부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화 현장에서 최근 기존의 성역할을 전복하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생산되어 온 슈퍼 히어로들이 한결같이 남성이었던 점을 상기해보면 근래 국내외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등장하는 여성 영웅물은 분명 새로운 경향입니다.

그 일례로 2017.02.24 ~ 2017.04.15에 JTBC가 방영했던 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선천적으로 괴력을 타고난 도봉순이 누군가의 협박을 받고 있는 게임 회사 대표의 보디가드로 활약하면서 동시에 잔인한 여성 연쇄 납치범까지 잡는 이야기입니다. 귀엽고 작은 체구의 연약해 보이는 도봉순은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하면서 동네 건달부터 연쇄 납치범까지 많은 악인 남성들과 맞서 싸웁니다.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흥미와 쾌감을 선사한 이 드라마는 많은 관습적 전통들을 거침없이 뒤집었습니다.

우선 보디가드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건장한 남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 <보디가드>에서처럼 그런 남성은 주로 연약한 여성을 지켜줍니다. 그런데 <힘쎈 여자 도봉순>은 그런 고정관념들을 완전히 해체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나약한 존재, 그래서 남자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부터, 보디가드는 덩치가 크고 건장한 육체의 소유자라는 인식까지 말입니다. 이 드라마는 실제로 영화 <보디가드>를 패러디하고 있음을, 괴한의 구슬총에 맞은 남자 주인공을 도봉순이 안고 뛰는 장면에서 영화 <보디가드>의 OST가 흘러나오는 코믹한 설정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이 드라마를 집필한 백미경 작가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 드라마에 대해 “한국 최초 여성 히어로물"이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라며 자부심과 애정을 밝혔습니다. 국내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시청률을 올린 이 드라마는 미국을 포함한 해외 여러 나라에 판권이 판매되어 리메이크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 영웅물이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신드롬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올여름 개봉했던 마블 어벤저스 시리즈 중 하나인 <블랙 위도우>입니다. 그동안 남성 히어로들과 함께 어벤저스 팀의 일원으로 등장해왔던 블랙 위도우를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그녀의 어두운 과거와 그에 대한 복수가 영화의 중심 서사를 이룹니다.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는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길러져 잔인한 인간 병기가 됩니다. 그러다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결국 자신을 그렇게 만든 드레이코프 장군을 제거하고 그의 손아귀에서 다른 여성 위도우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2008년부터 시작하여 거의 15년 동안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 맨, 스파이더 맨 등의 남성 히어로들을 탄생시킨 마블 영화사가 마침내 여성 감독 케이트 쇼트랜드(Cate Shortland)를 내세워 여성 영웅 이야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며 기존의 남녀 고정관념을 깨고 전복시키는 현상이 고전 문학의 서사도 거침없이 뒤집고 있습니다. 그 일례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바탕으로 2018년에 제작되어 국내에서는 올여름 개봉된 영화 <오필리아>입니다. 이 영화는 원작에서 비교적 역할이 적었던 오필리아의 시각으로 전체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원작에서 순종적이고 수동적이기만 하다가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한 캐릭터와 전혀 다르게 주체적이고 남성들만큼이나 지적 욕구를 지닌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가 그린 유명한 오필리아 죽음 장면을 패러디한 화면과 함께 오필리아가 “드디어 내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왔군요”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이 대사의 암시대로 영화 속 오필리아는 주변 세계로부터 늘 구속당하고 무기력하게 휘둘리는 인물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하는 여성입니다.

궁극적으로 영화의 말미에 오필리아는 원작과 달리 살아남습니다. 햄릿이 원작에서는 숙부에 대한 복수를 마무리하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영화에서는 검술 경기를 하다가 무기력하게 죽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이런 강한 속성은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 왕비에게도 부여되었습니다. 숙부에 대한 복수를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햄릿 대신 그녀가 숙부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영화의 내용이 상당히 많은 점에서 원작의 내용에서 벗어나 있지만 이 영화가 주는 인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약한 남성, 강한 여성'입니다. 그동안 셰익스피어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쓴 많은 패러디들이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는 그 메시지가 너무 선명하여 다소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영화 역시 여성 감독 클레어 맥카시(Claire McCarthy)가 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국내외 문화계에 불고 있는 강한 여자 신드롬은 페미니즘 이론으로 무장한 여성 예술가들이 그동안 남성들이 구축한 남성 중심 서사와 관습을 뒤집고 해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 현상을 보면서 ‘그렇다면 남성 작가들의 그간의 행태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이런 천편일률적 회로 전환이 불편하고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낡은 집을 부수어야 새 집을 지을 수 있듯이, 그간의 고정관념을 깨고 뒤집는 이 과정이 정반합(正反合)의 필수 노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반(反)'을 거쳐, 보다 성숙하고 조화로운 '합(合)'으로 나아가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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