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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초등학교 운동회 풍경
한만수 2021년 09월 16일 (목) 00:00:50

추석에 찌는 송편에는 솔잎을 얹습니다. 솔잎을 얹는 데는 조상들의 놀라운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솔잎에서 나오는 피톤치드(Phytoncide)는 식물이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내보내는 항균성 물질입니다. 산림욕을 하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이유도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미생물들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림욕은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일사량이 많을 때가 효과적입니다.

소나무는 여느 나무들보다 피톤치드를 10배 이상 함유되어 있습니다. 추석 차례상에 올리는 송편에 솔잎을 얹는 이유는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서입니다. 올해처럼 추석이 따뜻한 계절에 올 때 쉽게 곰팡이가 껴서 먹지 못하게 됩니다. 조상들은 일찍부터 피톤치드의 항균성 효과를 발견한 셈이죠.

예전에는 추석 이튿날이나 늦어도 삼사일 후에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요즘에는 운동회라고 해서 학부형들이 참석하거나, 한 달 전부터 방과 후에 전 교생이 단체로 매스게임을 연습하지 않습니다. 그냥 달리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경기를 하여 순위를 가리는 정도로 치릅니다.

1960년대만 해도 초등학교의 운동회는 단순히 학생들의 체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운동회 하는 날은 동네가 너무 조용해서 개들도 짖을 일이 없어서 종일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날입니다.

어머니는 추석날 차례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챙기십니다. 송편은 햇볕에 말려두어야 합니다. 깜박 잊고 말리지 않은 생선을 찬장이나, 광에 보관했다가는 곰팡이가 끼기도 합니다. 곰팡이가 꼈다고 아까운 음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물로 헹구며 곰팡이를 제거하여 다시 솥에 찝니다. 소풍 때나 먹는 김밥을 중심으로 송편, 차례상에 올랐던 각종 부침, 찐밤, 찐땅콩, 찐계란을 찬합이나, 그릇에 담습니다.

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아 축축한 운동장 위로 만국기가 펄럭입니다. 푸른 하늘에는 솜을 찢어 놓은 것 같은 구름이 몇 점 떠 있습니다. 측백나무 울타리 앞에는 장사꾼들이 차양을 치고 국밥이며 국수를 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문방구 아저씨들은 각종 장난감을 난전에 펼쳐 놓고, 잡화점 아저씨들은 오늘을 위해 도매상에서 받아 온 과자며 빵을 박스에서 꺼내고 있습니다.

운동회 날은 학부형들만 학교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이 없어서 구경삼아, 놀기 삼아 오신 분들은 차양 밑에 가설해 놓은 식당으로 가시거나,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십니다.

지금은 충북 영동군 인구가 5만 명이 안 됩니다. 1960년대만 해도 12만명이 넘었습니다. 제가 살던 면소재지 인구만 해도 천 명이 넘는 데다 인근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나왔으니 운동장이 미어터질 지경이 됩니다.

혹자들은 운동회가 일제의 잔재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집단 훈련을 중요시하는 운동회를 적극 장려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운동회가 온 동네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으로 모아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구경하며 하루를 즐기는 축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전교생은 청군 백군으로 편을 갈라서 머리띠를 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 소속이 바뀔 수 있어서 머리띠는 양쪽면의 색깔이 흰색과 청색입니다. 6학년 몇몇이 앞에 나가서 청군기와 백군기를 흔들며 목청껏 고함을 지릅니다. 응원단은 자기편이 1등으로 달리면 모두 일어나서 팔짝팔짝 뛰면서 신나게 응원합니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점심시간입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에 어머니는 점심 때 만날 장소를 몇 번이나 당부하십니다. 3학년 1반 교실 앞으로 와라, 또랑가 추자나무 밑으로 와라, 영동 식당 뒤로 오라는 등 매번 약속 장소가 바뀝니다.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점심 먹을 장소를 찾아서 일제히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휩쓸려 엉뚱한 곳으로 가는 통에 아침에 알려준 장소를 잊어버리는 아이들도 종종 있습니다. 명식이도 그중 한 명입니다.

명식이 엄마는 동네에서 성질 급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자주 부부싸움을 하는데 부부싸움 원인이 거의 명식이 엄마의 급한 성질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식이도 엄마를 닮아서 성질이 여간 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니덜 엄마 교단 뒤 향나무 옆에 있구먼. 어여 가 봐라.”
아버지를 비롯해서 가족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점심을 막 먹으려고 할 때였습니다. 명식이 아버지는 해장부터 마신 술에 교사 뒤 음지에서 곯아떨어졌습니다. 명식이가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로 엄마를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명식이는 얼른 눈물을 닦으며 향나무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명식이가 질질 짜며 댕기걸레 아까, 측백나무 밑으로 보냈는데.”
이번에는 명식이 엄마가 치맛말기를 말아쥐고 바쁘게 명식이를 찾으러 다니다 우리와 만났습니다. 명식이 엄마는 고맙다는 말을 남길 겨를도 없이 측백나무 쪽으로 갔습니다. 밤을 까먹고 있는데 명식이가 또 나타났습니다. 측백나무 밑에 엄마가 없다는 겁니다. 명식이와 명식이 엄마가 번갈아 가며 찾아다니길 서너 번, 보다 못한 어머니가 명식이 손을 잡고 측백나무 밑으로 가셨습니다.

오후 경기는 누구나 배가 빵빵해지도록 점심을 먹은 탓에 오전보다는 응원 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점심때 반주로 술을 취하도록 마신 어른들은 느티나무나, 울타리 그늘 밑에서 코를 골며 주무시기도 합니다.

운동회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동네 대항 릴레이경주와 가마니 오래 들기입니다.

저학년 학생들이 부채춤을 추거나, 전교생의 매스게임 뒤에 벌어지는 동네 대항 경기는 동네의 자존심이 걸려 있습니다. 릴레이에서 1등을 한 동네는 이때를 위해 준비해 온 징을 치고 꽹과리를 두들기며 한바탕 춤을 춥니다.

모래가 들어있는 가마니 들기 대회에서 1등을 한 장정은 요즘 말로 스타가 됩니다. 운동회가 끝나고 한동안은 장날이나 삼거리에 그 장정이 나타나면 ‘저이가 가마니 들기 대회에서 일 등 했댜’ 하고 아주머니들이며 처녀들이 귓속말로 속삭입니다.

이윽고, 교장이 교단에 올라서서 폐막식을 선언합니다. 이긴 쪽은 만세를 부르며 깔깔거리고, 진 쪽은 떨떠름한 얼굴로 손뼉을 쳐주고 해산합니다. 아이들의 경기는 끝이 났지만, 어른들은 본격적으로 술잔치가 시작됩니다.

얌전히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술 취한 고함이 들리고, 주먹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동네끼리 패싸움으로 번지기도 하는 사이에 서산에 걸려 있던 노을도 피곤한 하루를 눕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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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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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도 (175.XXX.XXX.146)
딱 이맘때 쯤이군요. 아련한 추억의 저편에 있던 어릴적 영상이 엊그제 인양 떠올리게 하는 흐뭇한 풍경화 같네요. 덕분에 씨~익 미소지어 봅니다. 님의 `몽당연필`로 그려내는 추억이 이 힘든 시국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답니다. 일일이 답변으로 표현하지 않은 다수의 침묵 팬이 많다는 사실을 꼭 알아주세요. 고맙습니다. 또 다음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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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6 09: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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