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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게 기회다
박종진 2021년 09월 09일 (목) 00:25:02
   
  왼쪽부터 축구왕 연필, 녹색 파버 카스텔, 파란색 스테틀러, 분홍색 사파이어 연필  

서투르게 글씨를 익히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맨 처음 잡은 연필은 축구 선수가 그려진 오로라 연필의 ‘축구왕’이었습니다. 동아 연필의 ‘옥토끼’를 쓰던 친구도 있었고, 문화 연필의 ‘사파이어’를 필통에 잘 깎아 넣고 다닌 아이도 있었습니다. 아마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당시 독일의 교실 역시 비슷하여 파란색의 스테틀러 또는 녹색의 파버 카스텔, 아님 이름 모를 노란색 연필을 잡고 학생들은 공부를 했을 겁니다. 필통엔 지우개, 연필을 깎는 칼, 작은 자[尺]와 고학년(高學年)이면 샤프펜슬도 한 자루 있을 겁니다.

하나만 빼고 말입니다. 독일 초등학교 학생의 필통엔 만년필이 있습니다. 독일 초등학생이 본격적으로 만년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파커45 만년필이 나온 해이지요. 그렇다면 파커45 때문에 독일 학생들이 만년필을 잡기 시작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1.카트리지, 2.슬립 온 캡(slip on cap: 돌려 잠그고 여는 나사식이 아닌 밀고 당겨 빼고 끼우는 뚜껑) 3.금속 뚜껑 이 세 가지로 학생 만년필의 표준을 제시해 크게 성공한 것은 맞지만 독일 학생의 필통까지 점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엔 독일 만년필회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함부르크의 몽블랑(Montblanc)과 하노버의 펠리칸(Pelikan)과 게하(Geha) 등 여러 회사가 있었습니다. 1959년 펠리칸사(社)는 교사와 글쓰기 강사 수천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결과물로 이듬해 펠리카노(Pelikano)가 탄생했습니다. 몸체는 파란색, 뚜껑은 은색이었습니다. 사실 그 이전에도 학생용 만년필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잉크 카트리지  

대표적인 것이 1952년 출시된 몽블랑사(社)의 몬데로싸(Monte Rosa)인데 이것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잉크충전 방식이 피스톤 필러(Piston Filler: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고 펜촉 반대편 몸통 끝에 있는 꼭지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리고 다시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잉크를 충전하는 방식)라 학생들이 다루기 어려웠고, 아이들 손에 펜촉은 쉽게 망가졌습니다.

펠리카노는 이런 만년필들의 단점을 개선하였습니다. 펜촉은 파커51의 펜촉을 닮아 어린이들이 꾹 눌러도, 바닥에 떨어트려도 휘어지지 않을 만큼 강했고, 잉크병이 없어도 되는 편리한 카트리지 잉크충전 방식 적용했습니다. 카트리지 방식은 참 편리한 방식입니다. 카트리지는 탄알처럼 생긴 플라스틱 케이스에 잉크가 담긴 것을 딸깍 하고 끼우면 되는데, 잉크를 넣다가 엎지를 일도 없고 옷에 잉크가 묻지도 않았습니다.

파커45의 전 세계적인 성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독일에서는 성공합니다. 잉크병을 놓는 홈이 파인 책상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잉크병 또한 교실에서 없어졌지만 펠리카노의 경쟁자는 등장하였습니다. 이듬해 게하가 녹색 몸통의 카트리지 만년필을 내놓으면서 학생 만년필 시장에 뛰어들었고, 몽블랑 또한 카트리지 버전을 내놓았습니다.

   
  (위) 파커51 (아래) 파커51을 닮은 펠리카노 모델1  

하지만 펠리카노를 포함해서 이 만년필들은 완벽한 파커45에 비해 여러 모로 부족했습니다. 파커51을 닮은 펜촉은 잘 보이지 않아 아이들은 펜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어려웠고 돌려서 열고 잠그는 방식은 불편했습니다.

   
  펠리카노 모델2 광고 (모델 2는 파커 45를 닮았습니다.)  

1965년에 나온 펠리카노 모델2는 파커45처럼 그런 문제를 없앤 신형이었습니다. 펜촉은 커졌고 뚜껑도 당겨 빼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파커45와 다른 것은 손잡이에 주름이 있어 아이들은 어디를 잡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고 손에서 미끄러지지도 않았습니다. 1969년에 나온 모델3은 펜촉은 더 잘 보이게 더 커졌고 손잡이의 홈은 더 깊어졌습니다. 펠리카노의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단점이 보완되고 그 시대에 맞게 진화하였습니다. 모델 4가 1974년, 모델 5는 1979년, 모델 6은 1983년, 가장 오래간 모델 7은 1989년, 2000년에 모델 2000, 2003년에 모델 2003 그리고 생산 50주년을 맞이하여 모델 2010이 2010년에 등장하였고, 2010 모델은 지금까지 61년째 계속 생산되고 있습니다.

펠리카노와 파커45는 여러 면에서 비교되는 만년필입니다. 1960년 같은 해 등장하지만 전 세계적인 히트로 만년필세계의 명작인 파커45, 이에 반해 수집가들도 잘 모르는 펠리카노. 완벽하게 태어나 2007년 단종 때까지 거의 변함없었던 파커45, 끊임없이 개선되고 변신 중인 펠리카노.

   
펠리카노 50주년 광고 (파란색은 펠리카노의 시그니쳐 컬러입니다.) 맨 위 부터 모델1, 모델4, 모델7, 모델2003, 모델 2010

이 둘 중 어떤 만년필이 더 위대할까요? 지금으로선 파커45입니다. 하지만 펠리카노가 계속 진화한다면? 살아 있는 게 기회입니다. 불후의 명작은 오늘 저녁에 당장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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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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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기 (175.XXX.XXX.3)
독일 사람들은 어렸을 때에는 펠리카노를, 어른이 되어서는 펠리칸을 사용하겠군요~ 오늘 저녁에는 필통 한켠의 펠리카노를 꺼내서 사용해보아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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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13: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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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저는 이번 주말에 남대문에 가여구려 2000년 형 펠리카노를 어디선가 본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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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08: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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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175.XXX.XXX.150)
처음부터 전세계적으로 45만큼 잘 팔리지 않았을지라도 계속 제품을 보완하여 오래 명맥을 이어온 펠리카노가 대단해 보이네요. 살아남아야 기회가 생긴다는 말처럼 요즘 절실한 문구가 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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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1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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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쉬운 삶은 없습니다. 요즘 같은 경우 더욱 그러하죠. 하지만 한참 지나면 이시기도 추억이 될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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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08: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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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106.XXX.XXX.69)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면서 오래갈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 같습니다. 펠리카노를 통해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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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08: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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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만년필은 우리 삶과 많이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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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07: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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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사랑 (175.XXX.XXX.94)
어릴적 많이 보던 펜이 45였군요
덕분에 좋은 내용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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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0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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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저는 처음 만년필이 45 모조품 이었습니다. 진품을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지금도 45를 보면 마음이 두근두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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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07: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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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39.XXX.XXX.195)
기억을 더듬어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연필 사용을 권장했었습니다.
언제 본가에 간다면 어떤 연필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네요.
노벨상도 살아 있어야 받는다는데 펠리카노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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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07:5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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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아무래도 글씨를 처음 배울 때는 볼펜 보다는 연필 또는 만년필이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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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07: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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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박 (210.XXX.XXX.43)
파카45는 단종되어 전설로 남았지만 펠리카노는 현재도 생산 중이라 진화하고 있다고 봐야겠군요. 디자인과 성능에서 45를 능가하는 펠리카노가 나와주길 기대합니다.
유익한 글,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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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07:5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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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저도 45를 능가하는 펠리카노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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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07:4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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