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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현충원 둘레길에서
임종건 2021년 09월 06일 (월) 00:01:21

지난달 16일 광복절 다음 날 친구들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능선길을 걸었습니다. 해발 179m의 야트막한 서달산이 말발굽 모양으로 국립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거리 5.6km, 소요시간 2시간의 걷기 편한 길이었습니다.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현충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일 터입니다. 우거진 숲으로 인해 시선이 가려졌고, 현충원 전경을 조망할 용도로 세웠을 동작대마저 코로나19로 폐쇄돼 앞쪽의 한강과 남산, 뒤쪽의 관악산 등을 한눈으로 조망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습니다.

산책길 중간에 충효를 상징하는 조형물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갯마을 갈림길에 세워진 전화수화기 모양의 ‘효도의자’에 앉아 부모에게 안부전화를 거는 듯한 사람과 사당유니드아파트 갈림길에 세워진 어머니를 업은 아들 형상의 ‘어부바’ 조형물이 이채로웠습니다.

대통령 묘역을 둘러보자는 것은 일행의 이심전심이었으므로 산책길 중간인 상도문에서 현충원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이곳 대통령 묘역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묻혀 있습니다.

상도문에서 대통령 묘역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1979년 10·26사태로 타계한 박정희 대통령 묘소였습니다. 묘소는 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넓은 면적(580㎡)을 차지한 채 아래를 굽어보는 형상으로 조성돼 있습니다.

박 대통령보다 5년 앞서 육영수 여사가 타계했을 때 조성된 묘역이므로 사실상 살아있는 대통령의 묘지였던 셈입니다.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묘는 합장형태인 이승만 김대중 대통령 묘와는 달리 봉분이 따로따로인 쌍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묘역면적이 두 김 대통령 묘보다 배 이상, 이승만 대통령보다 배 가까이 넓은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위쪽으로 자리 잡은 위치와 함께 산 대통령에 대한 과공(過恭)의 흔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 대통령 묘역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묘소. 쌍분에다 계단 가운데에 회양목을 심어 분리한 것이 특이하다  

입구에서 묘소로 향하는 계단의 중앙에 회양목을 심어 분리한 것도 특이했습니다. 왕릉의 신도(神道)와 어도(御道)를 연상케 했습니다. 전날이 육 여사 서거 47주기여서 조화가 여럿 놓여있었는데, 여야 대선 주자 가운데는 국민의힘 윤석열, 최재형 후보의 것만 눈에 띄었습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해 미국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대통령이 1965년 7월 망명지에서 타계하자 정부는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대통령 묘역의 중앙에 안장했고, 1992년 프란체스카 여사와 합장됐다고 합니다.

건국대통령으로 예우를 했을 법도 하지만 국장이냐 국민장이냐를 놓고 입씨름만 하다가 가족장으로 치러야 했을 정도로 파란 많은 일생이었습니다. 이 대통령 묘소에는 다른 대통령 묘와는 다르게 태극기가 높이 게양돼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을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관리자는 말했습니다. 그것으로나마 건국대통령의 표지로 삼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묘소는 박정희 이승만 대통령 묘소 중간의 왼쪽을 파고든 형상이었습니다. 서울현충원 대통령 묘역은 박정희 대통령 안장으로 규정상 포화상태여서 다음 대통령부터는 대전현충원에 모시기로 했고, 2006년 타계한 최규하 대통령 장례 때 그 규정이 적용됐습니다.

2010년 김대중 대통령이 타계하자 가족과 지지자들은 대전현충원 안장을 극력 반대했습니다. 노령의 미망인 이희호 여사에 대한 참배의 편의 제공이 반대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다소 억지스럽게 마련된 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2015년 김영삼 대통령이 타계했을 때 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울에 묻혔으니 김영삼 대통령도 서울에 묻혀야 한다고 지지자들은 주장했습니다. 김 대통령이 현충원 건너편 상도동에서 살았다는 것도 서울현충원에 묻혀야 할 이유였을 겁니다. 그렇게 대통령 묘역에서 500m쯤 떨어진 제3 장군묘역 귀퉁이에 유택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대통령 묘역을 벗어나 자리를 잡게 됨에 따라 다른 대통령들이 동쪽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것과 달리 김영삼 대통령은 남쪽을 보고 누워 있습니다. 생전에도 치열한 정치적 경쟁자였던 두 김 대통령은 죽어서도 누울 자리 경쟁을 치열하게 벌인 셈입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대통령 묘역을 둘러보고 나서 “씁쓸하다”고 했습니다. 높다란 봉분도, 우람한 비석도 왕릉을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름과 생년 생몰 연대만 새긴 뉘인 비석과 꺼지지 않는 횃불로 남은 미국 워싱턴 알링턴 국립묘지의 존 케네디 대통령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4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습니다. 두 분은 감옥에 있고, 두 분은 병이 위중한 상태입니다. 그 중에서 최근 5·18과 관련해 재판을 받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이 혈액암으로 투병 중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전 대통령이 타계할 경우 장례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는 또 한 번 소동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상치 않은 반전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인 이순자 여사는 2017년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편이 사후에 어디로 가느냐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사치다. 그 양반 만약 그렇게 되면 나를 화장해서 이북이 보이는 곳에 뿌려달라고 했다.” 이 말이 사실이고, 또 실행된다면 전두환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끗하고 사려 깊은 방법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한 정치지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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