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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구름을 닮은 흰머리
노경아 2021년 09월 01일 (수) 00:02:22

흰머리도 패션이 될 수 있을까?
가을로 들어서면서 친구 혹은 선배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아직은 안 돼. 적어도 환갑은 넘어야지. 50대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라... 패션은커녕 게을러 보일 뿐이야. 절대 안 돼.” ”중년에겐 흰머리가 충분히 패션이 될 수 있어. 다만 옷을 잘 입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지. 흰머리와 빨간색 재킷, 흰머리와 파란색 원피스, 넘 멋지지 않니.“

염색을 그만두려고 물어본 건데 의견이 나뉘니 고민이 더 커집니다. 염색을 시작한 지 20년가량 됐습니다. 반짝반짝 윤기 나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아주 먼 옛날이야기입니다. 잦은 염색 탓에 머리를 감고 대충 말리면 부스스해 침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두피 문제로 병원을 찾기도 했습니다. 친구들 권유로 값비싼 천연 염색 제품을 써봤지만 피부에 해가 되긴 마찬가지입니다. 염색하는 횟수를 줄이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그러면 주변에서 귀신같이 알아챕니다.

”아직 새파란 애기 엄마가 뭔 고민이 그리 많아 머리가 하얗게 셌댜? 시(세)상에나. 딱하기도 하지. 집에서 누가 괴롭혀유? 시엄니가? 아님 애 아부진가?“

30대 중반, 아파트 놀이터에서 딸아이와 놀아주다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이없고 화가 났지만 동네 어르신의 진심이 느껴져 태연한 척 미소 지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이후 염색을 더 자주하게 되었습니다. ‘흰머리=문제 많은 집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변의 시선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기 때문입니다.

내 흰머리는 집안 내력입니다. 엄마는 물론 엄마의 엄마, 엄마의 엄마의 엄마도 마흔 전에 백발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문의는 “머리카락을 생성하는 피부기관인 모낭에서 검은 색소(멜라닌)를 만들어내는 멜라닌 세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생기는 것이 흰머리”라면서 “안타깝게도 머리카락은 흰머리 유전자가 우성이라서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젊어서 흰머리가 나왔다면 자식도 그럴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유전으로 인한 흰머리는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요즘엔 스트레스로 백발이 된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대학입시에 치인 ‘어린 백발’, 좁은 취업문에 고통받는 ‘청년 백발’…. 모두가 욕심 많은 어른들 탓인 듯해 미안하고 안쓰럽습니다.

‘스트레스와 흰머리의 상관 관계’는 역사적 인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늘천 따지 거물현 누를황…” 1,000자로 된 250개의 사언시 ‘천자문(千字文)’을 만든 중국의 학자 주홍사입니다. 그는 “1,000개의 글자를 사용해 시를 지어라. 글자가 겹치면 죽는다”라는, 형벌과도 같은 양무제의 명을 받아 하룻밤 새 천자문을 지어 올린 후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셌다고 전해집니다.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입니다.

프랑스 왕 루이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도 흰머리 얘기로 유명합니다. 그는 서른여덟 살이던 1793년 10월 단두대 처형을 앞두고 하루 만에 백발이 됐다지요.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의료계에선 이를 근거로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이란 용어를 만들어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나 슬픔, 공포 등으로 머리카락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하얗게 센다면, 가슴속 부담과 화를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애써 아닌 척, 태연한 척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병이 들게 마련입니다. 흰머리가 그 증거입니다. 화를 털어내고 욕심도 버리세요. 속 편히 생활하다 보면 젊음의 상징인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년 된 내 흰머리는 어쩔 거냐고요? 지난 주말 서울 근교 숲속 카페에서 좋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답을 찾았습니다. 가을 햇살 아래 반짝이는 흰머리의 선배, 친구들에게서 관록과 여유, 낭만을 보았습니다. 나이듦을 당당히 받아들이는 모습들이 멋져 보였습니다. 나도 자연스럽게 나이들겠습니다. 햇빛을 받으면 하얗게 빛나는 뭉게구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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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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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용 (220.XXX.XXX.57)
반백은 너무 멋져 보입니다.
올백은 좀 그렇고- ㅎㅎ
저도 염색에 고민이 많은사람인데요
어쩜니까 부모님이 주신 선물을 좋은의미로 받아들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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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1 17:3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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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 (116.XXX.XXX.129)
저는 올백이라 고민이 컸는데, 뭉게구름처럼 살아볼까 합니다.
부모님이 주신 중후한 선물, 잘 가꾸며 살겠습니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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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1 18: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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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빈 (203.XXX.XXX.45)
이젠 새치도 아니고... 흰머리로 염색을 하면서도 눈에 대한 부정적 부담이 절로 더해 갑니다.
제 R친구 녀석은 머리가 아예 하얘져서 누가 보면 외국영화에 나오는 은발의 영화배우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읽은 이야기로 기억됩니다만, 어느 백발의 80내 할머니가 번지점프를 하고 나서 머리가 다시 검게 변했다는 기적이 제게도 찾아 온다면 눈 딱 감고 한 번 뛰어 내리고도 싶습니다.
강한 스트레스나 쇼크를 받으면 머릿 속이 하얘지는 것도 멜라닌 색소와 연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그나저나, 우리 애들은 누구를 닮아서 벌써부터 새치가 많은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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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1 08: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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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 (116.XXX.XXX.129)
대장님께선 인물이 훤하시니 백발도 멋질 것 같습니다. 번지점프 뭐 이런 거 하지 마시고 중후한 멋쟁이로 거듭나시길 강추합니다.
애들은... 혹시 부모님께서 뭔가 부담을 준 건 아니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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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1 18: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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