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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만년필의 탄생
박종진 2021년 08월 11일 (수) 00:08:11

몇 년 전 외국 여행을 많이 다닌 친구와 내기가 걸렸습니다. 친구는 세계 어디를 가도 싸고 맛있고 친절하고 빠른 음식점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맞는 말 같았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 단골집 한 곳이 떠올랐습니다. 친구는 만약 그런 곳 있다면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요리조리 골목길로 택시를 탄 것 보다 빠르게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빈자리 없는 가게 안을 보고 친구가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자리는 곧 생겼습니다. “수십 년 단골을 기다리게 할 수 있나?” 사장님은 문 앞에 있던 맥주 박스를 치우고 파라솔을 펴 자리를 뚝딱 만들어 주셨습니다. 음식은 푸짐하고 맛있었습니다. 단골찬스를 쓴 반칙이라고 한마디 붙였지만, 친구는 기분 좋게 지갑을 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학생용품 카탈로그

만년필 세계에도 이런 반칙같은 만년필이 있을까요?
파커, 셰퍼, 워터맨, 월 같은 큰 회사가 값싼 만년필을 만든 것은 1929년 대공황(大恐慌) 이후인 1930년대부터입니다. 한 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였습니다. 펜촉은 몸통에 비해 작았고, 잉크를 넣는 방식으로는 1920년대 구식(舊式)인 레버 또는 버튼필러가 장착되었습니다. 장점 이라고는 값만 싼 이 만년필들은 처음엔 잘 팔렸지만 곧 시들해 졌습니다.

파커51을 닮은 파커21

고객이 다시 지갑을 여는 싸고 품질 좋은 만년필이 등장한 것은 1940년대 말입니다. 1940년대 초 파커는 그 유명한 파커51을 출시하여 만년필 세상을 바꿀 만큼 큰 성공을 이루고, 값은 파커51 가격의 절반도 되지 않고, 품질은 물론 모양까지 비슷한 파커21을 내놓았습니다. 파커51을 갖고 싶었지만 가격이 부담되었던 사람, 싼값에 품질 좋은 만년필을 갖고 싶었던 사람, 파커51을 갖고 있지만 새롭게 적용된 잉크충전방식이 궁금했던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구입하여 파커21은 저가 시장을 평정(平定)하게 됩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영원할 것 같았던 파커21의 인기는 7~8년이 지나자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고객은 싫증내기 마련이고 새로운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1953년 워터맨은 기울어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새로운 잉크충전방식인 카트리지(cartridge) 만년필 C/F를 출시합니다. 카트리지 방식은 잉크를 플라스틱 튜브에 담아 탄알을 장전하듯이 끼워 쓰는, 잉크병이 필요 없는, 편리하고 획기적인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워터맨은 이듬해 맥없이 무너져 성공의 열매를 따지는 못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셰퍼 광고

성공의 열매를 딴 것은 파커와 둘도 없는 경쟁자인 셰퍼였습니다. 1955년 셰퍼는 파인라인 카트리지 펜(Fineline Cartridge Pen)이란 이름의 만년필을 내놓는데, 워터맨이 그토록 공드린 새로운 잉크충전방식을 도입해 파커21 보다 약 5분의 3 정도인 싼값에 내놓았습니다. 싸고 편리하면서 품질까지 좋은 이 만년필은 학생들이 구매의 주축이 되어 성공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공식이 탄생하는데 저가(低價)+카트리지=학생만년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식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멋입니다. 잠시 학생 때 돌아가면 청바지에 줄을 잡고, 나팔바지를 세탁소에 맡기고, 도끼 빗을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던 그대들. 그때는 학생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멋을 더 따지고 훨씬 더 민감하다는 것을 파커는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1960년 파커45는 탄창을 쉽게 갈아 끼울 수 있는 유명한 권총인 콜트 45에서 그 이름이 탄생하였고, 파커51보다 더 세련된 외관에 카트리지 방식은 물론 컨버터(카트리지 대신 병잉크를 사용할 수 있는 장치, 이것 역시 파커45가 최초입니다.)를 선택 구매할 수 있는, 여기에 금촉까지 끼워 파커21과 같은 값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싸고, 편리하고, 튼튼하고, 멋까지 있는 반칙 만년필 파커45는 말도 못하게 크게 성공합니다.

 
다양한 파커 45의 종류, 이것은 곧 성공을 의미합니다.

신경림 시인의 그 유명한 시가 있죠.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라는 구절이 있는 <가난한 사랑의 노래>를 인용한다면

“학생이라고 해서 멋을 모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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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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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 (39.XXX.XXX.49)
파카45 플라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원가를 절감시켜서 필기감의 퍼포먼스를 억제시킨듯한 학생 만년필은 썩좋아하지 않았지만, 저도 대학생 시절에는 세일러 에이스를 사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만드는 업체측에서도 이윤이 적어도, 실사용 학생 유저를 위해서 생산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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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5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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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욱 (112.XXX.XXX.86)
저의 첫 만년필도 파커45였습니다.
중학교 입학선물로 아버지가 사주신 파커45 였습니다.
그때는 잉크를 사주시지 않아 카트리지 하나 쓰고 서랍속으로 들어 갔던 것으로 기억되네요. 몇자루를 가지고 있어도 특이한 색상만 보이면 탐나는 만년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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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15: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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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03.XXX.XXX.153)
오렌지와 터콰이즈 같은 것을 보면 정말 침이 꿀꺽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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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17: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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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58.XXX.XXX.150)
45가 연 아름다운 스쿨펜의 세계에서 어떤 멋들어진 만년필들이 나왔을지 궁금해지네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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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12: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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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03.XXX.XXX.153)
다음 편에서 다뤄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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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16: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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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금 (39.XXX.XXX.216)
멋을 아는 학생들! 그런 학생들이 선택한 펜이라 그런지 45는 지금 봐도 예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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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07:3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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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75.XXX.XXX.251)
깨끗한 45는 언제 봐도 늘 두근두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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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09: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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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211.XXX.XXX.32)
물건이 싸고 품질 좋은 것 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겠군요.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할 준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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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07: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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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75.XXX.XXX.251)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그러는 성공하기 힘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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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09: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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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당 (175.XXX.XXX.94)
글을 볼 때마다 혜안에 놀라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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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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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75.XXX.XXX.251)
별것도 아닌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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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09: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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