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박종진 생각과 연장
     
만년필의 완성은 클립
박종진 2021년 07월 13일 (화) 00:05:15

우리가 알고 있는 클립(Clip)은 철사를 타원으로 만들고 그 안에 한 번 더 타원을 만들어 여러 장의 종이를 집어 한꺼번에 끼울 수 있는 것인데, 만년필에도 클립이 있습니다. 뚜껑 중앙에 넥타이처럼 매달려 있는 것, 이것이 클립입니다. 역할은 셔츠나 안주머니에 만년필을 끼울 수 있도록 하는 간단한 것으로 사실 없어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를 주름잡았던 최고(最高)의 만년필들엔 반드시 클립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실용적인 만년필의 시작은 1883년으로 클립은 1904년 워터맨사(社)가 처음 부착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회사이니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수도 없이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골라내면 콘클린(Conklin)사(社) 때문입니다. 1900년대 초 콘클린은 워터맨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습니다. 스포이트가 필요 없이 잉크를 넣을 수 있는 장치를 만년필 내부에 장착하여 크게 성공, 워터맨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워터맨은 부랴부랴 스포이트가 필요 없는 장치를 만들었지만 콘클린 만년필이 갖고 있던 또 하나의 장점인 책상에서 구르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볼록 튀어나오는 클립을 달아 책상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게 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만년필들은 뚜껑을 닫아 놓아도 잉크가 새기 일쑤였기 때문에 셔츠 주머니에 만년필을 꽂기엔 아무래도 무리였습니다.

워터맨 클립

어찌됐든 워터맨사는 클립 캡이라고 새기고 끝에 동그란 구슬이 달린 클립을 당시 돈 25센트 ~ 2달러를 내면 기본형부터 14K 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달아주었습니다. 일종의 옵션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추가로 돈이 더 들어가는 옵션을 얼마나 선택하였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몇몇 만년필 회사들은 워터맨의 시도를 곧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워터맨 다음으로 큰 회사였던 파커와 콘클린, 그리고 몇몇 회사들은 V.V 클립(Van Valkenburg 특허로 상단을 누르면 집게처럼 벌어지는 클립)을 달았고, 얼마 후 잉크가 새지 않는 안전한 뚜껑이 등장하자 다른 회사들도 클립을 옵션에 넣기 시작하였습니다.

1913년 창업한 셰퍼사(社)는 클립을 좀 더 발전시켰습니다. 셰퍼사의 클립은 기능에 충실한 워터맨사의 CLIP-CAP 클립과 다르게 SHEAFFER-CLIP이라고 회사명을 새겨 넣어 클립만 봐도 셰퍼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상징성이 추가된 좀 더 진화된 클립을 선보였습니다.

셰퍼의 성공은 한마디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습니다. 1914년~1925년 만년필 시장이 400% 성장할 때 셰퍼는 같은 기간 2,000% 성장을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1920년대 가장 뛰어난 잉크 충전 방식인 레버필러가 그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사업 초기부터 제시한 셀프 필러+클립+스크루캡(나사식으로 뚜껑을 돌려 잠그고 여는 방식)의 조합은 당시 가장 탁월한 판단이었습니다.

셰퍼와 둘도 없는 경쟁 관계 파커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파커 역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짧게나마 V.V 클립을 장착한 적이 있고, 첫 번째 1910년대 초반에 등장하여 1916년까지 사용된 레벨 록(Level-Lock) 클립은 성공은 못했지만 자사 클립을 갖고 싶은 열망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열망의 결실은 1916년에 나온 새로운 클립 이었습니다. 이 클립의 아이디어는 파커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좌) 와셔클립의 특허도 (우) 파커의 화살 클립

이 단순하고 혁신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뚜껑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위는 수나사를 파고 아래는 암나사를 내어 만들고, 납작하고 동그란 고리(washer)가 달린 클립을 그 사이에 끼워 클립을 고정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 클립은 와셔클립(washer clip)이라고 불렸는데, 조립하기 쉽고 튼튼할 뿐더러 분해도 쉬어 수리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만년필 역사상 최고의 클립이 탄생한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 파커사는 CLIP을 아예 떼어버리고 클립엔 PARKER와 특허 날짜만 새겨 넣었다는 점입니다. 파커의 역사와 품질, 그 오랜 세월동안의 노력, 이 모든 것을 상징하는 화살 클립은 이 클립이 발전하여 193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PARKER 마저 없어져 그 자체로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스스로 파커가 됩니다.

우스갯 소리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합니다. 만년필의 얼굴은 클립입니다. 그러니까 만년필의 완성은 클립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15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양세현 (39.XXX.XXX.49)
일본 만년필에 있어서 클립은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울리지 않는 볼클립의 파일럿, 몽블랑을 카피한 세일러와 플래티넘, 독자적으로 인정받는 클립을 만드는 제조사가 되었을때 한 단계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빈티지 일본 만년필과 비교하면 어쩌면 퇴보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해마다 컬러를 바꾸는 마케팅보다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젊은 감각으로 다시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답변달기
2021-11-27 12:34:32
0 0
만년필 (175.XXX.XXX.94)
만년필을 찾다가 보게되었습니다
나머지 글들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게됩니다
좋은 갈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21-07-13 12:26:59
0 0
박종진 (211.XXX.XXX.243)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하죠. 졸고 읽어 주시는 것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답변달기
2021-07-13 22:40:26
0 0
현상준 (223.XXX.XXX.151)
현대의 클립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알게되었습니다!
정말 펜의 역사상 획기적인 것인데 이렇게 최고의 클립이 탄생하였다니 놀랍네요. 오늘도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답변달기
2021-07-13 10:39:38
0 0
박종진 (211.XXX.XXX.243)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즐겁습니다. ^^
답변달기
2021-07-13 22:38:56
0 0
까치 (175.XXX.XXX.229)
파커 51 만년필을 쓰다보니 어느새 클립 밑 부분에 자국이 남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얼굴에 묻은 세월의 흔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것 같습니다 :)
오늘도 재밌는 글 감사드립니다.
답변달기
2021-07-13 10:34:31
0 0
박종진 (211.XXX.XXX.243)
맞습니다. 잘 관찰 하셨습니다. 오래된 만년필의 클립 온갖 풍상이 다 떠오르죠^^
답변달기
2021-07-13 22:37:18
0 0
차상욱 (112.XXX.XXX.86)
우린는 이미 익숙해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필기구에서 클립은 당연히 부착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만년필의 클립은 휴대성의 실용과 멋스러운 장식을 하게 하는 존재 인듯 합니다.
답변달기
2021-07-13 10:11:08
0 0
박종진 (110.XXX.XXX.58)
두 가지가 공존하는 존재 클립인 것 같습니다. ^^
답변달기
2021-07-13 22:09:22
0 0
김봉현 (106.XXX.XXX.142)
만년필의 마지막 구성요소인 클립은 마치 화룡점정을 하는 것 같네요.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그 펜에 맞는 클립은 펜을 돋보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21-07-13 08:21:53
1 0
박종진 (110.XXX.XXX.58)
화룡점정 너무 멋진 표현입니다.
답변달기
2021-07-13 22:07:47
0 0
Nerie (175.XXX.XXX.208)
부품 이름을 새겨서 인지도를 높이던 초기에서 완성된 형태로 바뀌기까지의 여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게 만년필 클립의 역사군요. 다양한 디자인으로 고금을 통틀어 회사의 정체성 확보에도 큰 역할을 하는 걸 보면 역시 대단한 부품입니다.
답변달기
2021-07-13 08:20:28
0 0
박종진 (110.XXX.XXX.58)
맞습니다. 펜촉이 영혼이라면 클립은 얼굴이죠^^
답변달기
2021-07-13 22:06:50
0 0
Hola (110.XXX.XXX.239)
확실히 클립의 형태에 따라 만년필의 전체적인 느낌이 달라지는 걸 보니
만년필의 완성은 클립이라는 말이 확 와닿습니다.
오늘도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21-07-13 07:55:31
0 0
박종진 (110.XXX.XXX.58)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클립이라 얼굴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답변달기
2021-07-13 22:04:31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