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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너무나 감각적인 우리말
권오숙 2021년 06월 25일 (금) 00:00:20

각 나라의 언어들은 참으로 다릅니다. 번역가로 활동하고, 번역 과목을 지도하다 보니 그 언어의 차이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됩니다. 언어마다 나름의 특징이 있어 어느 나라 언어가 더 좋고 나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영어에서 한국어로의 번역을 주로 하다 보니 두 언어의 차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언어의 차이로 인한 번역의 한계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영문학 작품, 그중에서도 주로 운문으로 쓰인 셰익스피어 극들을 번역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영어에서 운율과 음악성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강세가 한국어에는 없다는 점입니다. 영시나 영어 동화는 이런 강세를 이용하여 일정한 리듬 규칙을 만들고 음악성을 창출합니다. 영시에서 가장 좋아하는 리듬은 약강조(弱强調)입니다. 셰익스피어 극이나 소네트도 이런 약강의 리듬을 한 행에 다섯 번씩 써서 리듬감을 창출합니다.

그러나 강세가 없는 우리나라 말로는 이런 리듬감을 살려낼 길이 없습니다. “번역은 반역”이니 하는 표현들은 아마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이런 언어적 한계 때문에 생겨난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번역 회의론자 혹은 비관론자가 되었습니다. 번역가가 번역에 비관적이라는 말은 상당히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입니다. 다만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개가 낫다”(A live dog is better than a dead lion.)는 속담으로 고대 서사시들의 번역에 의미를 부여했던 서양 번역가들처럼 저도 셰익스피어를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못난 개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럼 강세가 없는 한국어로는 리듬감이나 음악성을 창출할 수 없다는 소린가? 아닙니다. 한국어에서는 너무나 감각적인 의태어, 의성어가 강세 대신 리듬감과 음악성을 톡톡히 창출해냅니다. 우리말에는 사물의 소리를 모방한 의성어와 사물의 상태나 모양을 모방한 의태어가 대단히 발달해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오감, 즉 청각, 시각, 미각, 후각, 촉각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단어들입니다.

한국어의 의성어, 의태어는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아주 풍부할 뿐만 아니라 사용 빈도도 아주 높습니다. 사전에 등재된 35만~40만 어휘 중 의성어와 의태어가 15,000개 이상이나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박동근 2008: 12). 이에 비해 영어의 경우 의성어와 의태어의 수가 1,500여 개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아동문학 번역을 할 때 우리말의 의성어, 의태어가 지닌 놀라운 힘이 가장 잘 발휘됩니다.

제가 아동문학 번역 수업에서 맛깔나는 번역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항상 예로 드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very old man and a very old woman.”입니다. 영어 문장만 보면 도저히 맛깔나는 번역이 탄생할 여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문장을 던져놓고 잠시 학생들이 창의적인 생각을 할 여유를 줍니다. 꽤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한두 학생이 떠올린 기막힌 한국어 표현에 교실이 술렁입니다. “옛날 옛날에, 꼬부랑 할머니와 꼬부랑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옛날 옛적에, 호호 할머니와 호호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노인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의태어들을 사용한 맛깔나는 번역들입니다.

한국어에서는 동사와 의성어, 의태어가 함께 사용되어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표현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영어에서는 의성어, 의태어를 담은 동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지배적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경우 ‘웃다’라는 동사 앞에 ‘방긋’, ‘싱긋’, ‘낄낄’, ‘키득키득’, ‘깔깔’, ‘빙그레’, '하하', '호호' 등 다양한 의성어나 의태어를 붙여 구체성과 생동감을 더할 수 있습니다. ‘울다’ 앞에도 ‘흑흑’, ‘징징’, ‘훌쩍훌쩍’, ‘펑펑’, '엉엉' 등을 붙임으로써 다양하고도 생동감 있는 묘사가 가능합니다. 반면, 영어의 경우 동사 안에 의성어, 의태어적 요소가 담겨 있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laugh’ 앞뒤에 형용사나 부사를 붙이기보다는 ‘chuckle’, ‘cackle’, ‘giggle’ 등의 서로 다른 의미의 동사를 사용합니다.

게다가 한국어에서는 의성어, 의태어를 주로 반복형으로 사용하여 독특한 리듬감과 운율을 창출합니다. “빵빵, 깡총깡총, 더듬더듬, 가물가물, 뭉기적뭉기적, 어슬렁어슬렁, 철퍼덕철퍼덕”처럼 말입니다. 꼭 같은 어휘의 반복이 아니더라도 살짝 변형된 부분 반복도 많습니다. “알콩달콩, 싱숭생숭, 알록달록, 울통불퉁, 티격태격” 같은 것들이 그 예입니다.

이렇듯 언어 자체에 강세가 없어서 리듬감과 음악성의 창출이 어려운 우리말에 다채롭고 풍부한 의성어, 의태어는 리듬감과 음악성은 물론 감각적인 면모까지 부여해줍니다. 한류의 흐름을 타고 전 세계에서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도 강의를 하며 느꼈던 우리말의 감각적인 우수성에 대해 한마디 거들어보았습니다. “개구리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개똥벌레 윙 하니 날아오더니 가쁜 숨 허덕허덕 말 물었네.” “디퍽디퍽 걷다가누 앞으로 쓰러지고 디퍽디퍽 걷다가누 뒤로 넘어졌네”(<개구리네 한 솥밥> 중)와 같은 우리의 옛 동화 작가 백석처럼 우리 감각에 착착 둘러붙는 맛깔나는 글들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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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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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관찰자 (175.XXX.XXX.167)
조곤조곤 들려오는 우리말이 무척 공감이 갑니다. 평소에도 매우 우수한 언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일본어는 상냥하게 들리기는 하나 표현음소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그 한계를 느낍니다.
다른 언어에 대한 편견은 안 가지려고 많이 노력합니다만 듣기만 해도 시끌시끌한 강세에 짜증이 나는 중국어는 어쩔 수 없어 보입니다. 거기에 코로나를 전세계에 퍼뜨린 원죄도 있어 중국인이 세계인과 조화롭게 살아가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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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30 16:23:37
0 0
임성빈 (14.XXX.XXX.141)
우리말의 우수성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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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09:34:46
0 0
권오숙 (175.XXX.XXX.176)
그러셨다니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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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16: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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