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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에 눈 맞추기
방석순 2021년 05월 10일 (월) 00:00:18

TV 화면에 어린 아기나 여러 가지 동물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즐기는 볼거리입니다. 동물 다큐라 해도 사자나 호랑이가 등장하지 않으면 시시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MGM 영화 첫머리에 나오는 거대한 수사자의 머리와 갈기만 보아도 멋지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암사자들이 포복 자세로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가 벽력같이 뛰어나가 제 몸의 서너 배나 되는 물소를 제압하는 광경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어찌된 셈인지 요즘엔 그런 장면을 애써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맹수들의 포식 장면보다는 철따라 날아드는 크고 작은 새들의 비행과 군무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지난겨울 팔당댐 아래는 북에서 날아온 귀한 손님 고니 떼의 흰빛으로 한동안 강안이 환했습니다. 무리 중 한두 마리만 공중으로 날아올라도, 아니 물가에서 날갯짓만 해도 횃불을 쳐든 듯 금세 강변이 환히 밝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봄철 작은 새들의 사랑 노래,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는 모습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러다보니 새에 관한 책과 CD까지 사서 보고 듣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산이나 들에서 서툰 솜씨로나마 잘 보이지도 않는 새들을 감별해 보는 즐거움도 얻게 됐습니다.

예전엔 꽃 하면 으레 장미, 모란, 목련을 떠올렸습니다. 크고 화려하고 강렬한 색상의 그런 꽃들이야말로 꽃다운 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엔 왜 알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작은 풀꽃들이 그렇게 눈길을 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른 봄 산행 길에는 손톱 크기의 작은 제비꽃이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자주색과 흰색, 노란색으로 피어나는 꽃들이 귀엽기 짝이 없습니다. 양지꽃, 현호색, 괭이눈, 개별꽃, 얼레지, 애기똥풀 모두가 예쁘게 보입니다. 그것들의 이름과 내력을 들춰보는 건 또 다른 재미입니다. 늦가을 산길을 밝히는 구절초, 벌개미취, 쑥부쟁이를 구분해 보느라 헛심을 쓰는 일조차 즐겁습니다. 자유칼럼에 연재되는 박대문 ‘야생초사랑’에 모범 답안이 가득한데 막상 산에서 들에서 마주치면 여전히 헷갈리기 일쑤입니다.

왼쪽부터 (외래종)민들레, 종지나물(일명 미국제비꽃), 큰개불알풀.
그런데 '큰개불알풀'은 풀꽃을 사랑하는 이들이 제발 '봄까치꽂'이라 불러 달라 신신당부한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렇게 작은 것, 여린 것에 눈길이 쏠리는 현상이 제게만 오는 건 아닌가봅니다. 친구들도 작은 풀꽃 앞에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곤 합니다. 요즘 단체 카톡방은 온통 봄꽃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초원이나 밀림의 야수들을 쫓고, 잘 가꿔진 정원의 화려한 꽃들만 따라가던 눈길이 나이 들어서는 점차 주변 산야의 작은 동물, 풀꽃으로 옮겨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심미의 대상이 달라지는 심성의 변화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혹시 생의 전성기를 넘어서며 세상을 패기와 도전으로만 대하려던 자세가 수그러진 탓일까요. 혹은 나이 들어 심신의 기가 한풀 꺾인 자의 도피 심리일까요. 그런데 비지땀을 흘리며 오른 산마루에 펼쳐진 야생화 꽃밭을 보노라면, 호수나 강심을 가르는 철새들의 유영을 보노라면 그런 서글픈 감상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가슴에 희열이 가득 피어오릅니다.

​그래서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화내고 좌절하고 울고 웃다가 이제야 평정심을 얻어 제가 살아온 주변을, 자연을 보다 찬찬히 보는 눈이 열린 것이려니, 스스로 위안을 찾아봅니다. 현자는 못 되더라도 생의 또 다른 기쁨, 즐거움을 찾아내고, 비로소 자신을 낳고 길러준 자연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싹트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쉽게도 이른 봄꽃들이 몇 차례의 궂은비에 떨어지고, 가지에 매달린 꽃잎도 빛이 바래갑니다. 그러나 곧 온 산과 들이 철쭉, 아카시 꽃으로 또 한 번 화사한 옷을 갈아입겠지요. 창만 열면 꽃들의 맑은 향내가 날아드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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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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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58.XXX.XXX.51)
풀지기 박대문 선생님의 지적을 받아 사진설명 중 두 번째 꽃을 '종지나물(일명 미국제비꽃)', 세 번째를 '큰개불알풀'로 바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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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 19:43:13
0 0
이원명 (121.XXX.XXX.83)
근데 항상 의심스러운 것은 작은 들꽃에 나비와 벌들은 아떻게 앉지? 하는 생각입니다. 내 마음을 잘 달래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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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 15:23:34
0 0
방석순 (58.XXX.XXX.51)
道力 높으신 분이 하문하시니 감당키 어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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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 18:41:13
0 0
소천산방 이병길 (210.XXX.XXX.130)
공감가는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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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 10:53:48
0 0
방석순 (58.XXX.XXX.51)
멋진 필명을 가지셨네요.
아마도 제가 꿈꾸는 그런 산야에 묻혀 즐기시는 분인 듯싶습니다.
참 부럽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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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 11:59:36
0 0
꼰남 (222.XXX.XXX.192)
그러니까 필자님보다 어린 저는
아마도 조로했나봅니다^^.
흔히 '화무십일홍'이라고들 하지만
들꽃은 꽃 진 자리에 또 꽃을 피워
이를 눈여겨 보게 되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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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 10:18:22
0 0
방석순 (58.XXX.XXX.51)
꼰남 님이야 워낙 일찍부터 눈이 밝으셔서~
요즈음 가장 바쁘고 행복한 때를 맞으셨겠네요.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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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 11:55:17
0 0
임성빈 (203.XXX.XXX.45)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집 정원(서대문 안산 자락)에도 아까시 꽃이 많이 피어 올랐습니다.
자연은 오묘하게도 시기적절하게 서로 꽃을 순차적으로 피워서 봄부터 가을
까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합니다.
만약에 꽃들이 봄철에 일거에 핀다면 아마도 벌들이 살 수 없겠지요. 한 철만 일하고 1년 내내 먹고 살 방도가 없을 테니 말이지요.
반대로 벌들이 없다면 대부분의 꽃(충매화)들도 수분을 이루지 못해 아마도 번식을 못 하거나 이미 멸종되었겠지요.
이렇듯 자연은 상부상조하며 멋진 조화를 이루고 살아 합니다.
우리 미물 인간이 배워야할 큰 덕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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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 08:10:15
1 0
방석순 (58.XXX.XXX.51)
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는 월사금도 안 받고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들이 참 많이도 있구나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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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 11:53:2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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