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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같은 소설과 '황혼' 만년필
박종진 2021년 01월 06일 (수) 00:01:17

시내의 서점에서 찾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예쁜 책이었습니다. 두툼한 표지에 잘 펼쳐지도록 표지 가장자리에 홈이 들어가 있는 전형적인 고급 양장이었습니다. 투명한 비닐에 싸여 있어 책을 펼쳐 볼 수 없었지만, 반짝이는 빨간색으로 쓴 작가의 이름과 시무룩한 검정으로 쓴 스페인어 제목은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책을 펼친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저녁이었습니다. 마치 새로 들인 만년필에 바로 잉크를 채우지 않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쥐어 보기를 여러 번 한 다음 잉크를 넣는 그런 기분을 내고 싶었습니다. 기대처럼 책은 첫 문장부터 눈에 탁 박혔습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잊힌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려간 그 새벽을 기억한다.

잉크 한 모금을 먹여 펜촉이 종이에 닿는 순간 명기(名器)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책은 느낌 있게 출발하였고, 그 명기들이 마지막 한 글자까지 또렷하게 써지는 것처럼 끝까지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간간이 나오는 만년필에 관한 묘사는 저와 같은 만년필인(萬年筆人)들에겐 봉급보다 더 큰 보너스였습니다. 하이라이트는 아래의 석 줄이었습니다.

   그것은 만년필들의 여왕인, 번호가 매겨진 몽블랑 마이스터슈튀크 시리즈로 판매원은 거드름을 피우며 그 만년필의 소유자가 다름아닌 빅토르 위고였다고 장담했다. 그 금촉에서 『레미제라블』의 원고가 탄생했다고도 했다.

빅토르 위고(1802~1885)가 만년필을 썼을까, 하물며 몽블랑을? 실용적인 만년필은 1883년에 등장하고 몽블랑은 1906년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잔뜩 의문을 품고 있는데 작가는 한 장을 넘기자마자 주인공 아버지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합니다.

   “게다가 빅토르 위고 시대에 만년필이 존재했는지도 알아봐야 할 것 같구나. 사기꾼이 많거든."

입이 꽉 다물어지는 답변입니다. 사실 저는 그 한 장을 넘기는 동안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1930년대에 실재했던 만년필 세 자루를 신나게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것은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이 모델까지 한 콘클린사(Conklin社)의 노잭(NOZAC)입니다. 김소운 선생의 수필 『외투』의 한 대목에 등장하는 그 콘클린입니다.

   내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프랑스제<콩크링>- 요즘<파카>니 <오터맨>따위는 명함도 못 내놓을 최고급 만년필이다. -수필 외투의 한 부분

1904년 콘클린 광고

 

1930년대 생산된 콘클린 노잭

바로잡으면 콘클린은 프랑스 회사는 아닙니다. 1900년대 초 혜성처럼 등장하여 초반 몇 년 동안 더 오래파커나 워터맨을 당황케 한 것은 맞지만 , 파커나 워터맨이 명함을 못 내놓을 정도는 아니었고, 이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의 회사였습니다.

콘클린사의 공로는 만년필에 잉크를 넣을 때 스포이트를 갖고 다닐 필요 없이 만년필 혼자 잉크를 넣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획기적인 아이디어 역시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더 예쁘고 편리한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등장했고 1910년대 후반부터 콘클린은 선두권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노잭은 이 콘클린사가 1931년 출시한 것으로 이런 위기를 타개하고, 세상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할 요량으로 만든 야심찬 만년필이었습니다.
 

1929년에 첫 등장한 워터맨 패트리션 (1930년대)

두 번째는 1929년에 등장한 워터맨사(社)의 귀족이라는 의미를 가진 패트리션(PATRICIAN)입니다. 패트리션 역시 워터맨의 모든 운을 걸고 만들어진 만년필입니다. 워터맨 사는 사업을 시작한 1883년부터 콘클린사가 등장했을 때 잠깐 흔들렸을 뿐 수십 년 간 큰 어려움 없는 안정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딱딱한 펜촉이 유행하면서 파커와 셰퍼가 각광을 받자 워터맨사는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약간 늦긴 했지만 1929년에 승부를 건 만년필이 패트리션입니다.

 

1930년대 애버샵 도릭 만년필

마지막 세 번째는 1931년 첫선을 보인 에버샵사(EVERSHARP 社)의 도릭(DORIC)입니다. 도릭 역시 회사의 명운을 짊어지고 태어난 만년필입니다. 원래 필기구 회사가 아니었던 에버샵은 기계식 펜슬(일명 샤프)을 인수하여 재미를 본 후 만년필회사까지 사들여 단숨에 만년필 세계의 선두권에 진입한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성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였고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만든 것이 도릭이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세 자루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회사의 명운을 짊어지고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이 세 자루는 회사를 구했을까요? 성공했다면 몽블랑이 아닌 이 만년필들 중 하나가 소설속에 등장했겠지요. 해가 뉘엿뉘엿 질 때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만들 듯이 만년필들은 그 회사들의 황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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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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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203.XXX.XXX.2)
만년필에 대한 도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잔잔하게 풀어나간 이야기가 참 재밌습니다. 올해도 건필하시고 흥미로운 만년필의 세계를 계속 펼쳐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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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17: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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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75.XXX.XXX.149)
격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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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20:5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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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혁 (1.XXX.XXX.252)
잊힌 만년필들의 묘지로 처음 내려갔던 순간이 기억나는것 같습니다 :) 꼼꼼하고, 무엇보다 첫 인상에 눈에 탁 박혔던 펜 세 자루라고 기억하는데 말씀하신 책도 그렇다니 한번 읽어봐야할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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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3: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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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0.XXX.XXX.153)
빈티지의 세계가 재미있는 것은 서로 모양이 다르고 저마다 확실한 개성이 있기 때문이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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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20: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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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 (59.XXX.XXX.46)
만년필에 대한 지식이 참 방대하네요.혀가 절로 둘러집니다.
무엇보다 스페인 작가 까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를 언급하셔서 두 눈이 번쩍 뜨입니다. 누구라도 책을 읽게 만들고 도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동기부여를 해주는 책 같아요. 2020년 56세 나이로 영면하여 안타까움이 가득했지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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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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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75.XXX.XXX.44)
<바람의 그림자>는 만년필이 이끈 보물 이었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작년에 영면하였네요. 명작으로 태어나 오래 생산되지 못한 위의 만년필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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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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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 (211.XXX.XXX.77)
멋진 만년필들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정서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시대에 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아름다운 물건을 설계하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고, 기능적으로 그 완성을 체험하는 과정 하나 하나를 생각해보면 정말 즐겁습니다. 만년필은 인류의 위대한 유산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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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1:03:22
0 0
박종진 (39.XXX.XXX.86)
위대한 유산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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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2: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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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106.XXX.XXX.240)
말씀하신 펜들이 비록 회사의 명운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만년필인으로서는 그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니, 그 자체로 즐거운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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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08:4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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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39.XXX.XXX.86)
정말 그렇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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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2: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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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175.XXX.XXX.150)
마지먹 순간 화려하게 불타올랐던 아름다운 펜에게 황혼이라는 표현이 정말 떡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지금에 와서도 정말 아름다운 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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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07: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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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39.XXX.XXX.86)
로고가 먼저 보이는 요즘에 없는 아름다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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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2: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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