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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먹고 입으로 나오는 것은
박종진 2020년 12월 03일 (목) 00:02:14

요즘은 만년필 연구소가 있는 을지로가 ‘힙지로’라고 인파로 북적대지만,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연구소가 있는 인쇄 골목엔 사람보다는 “착착” 소리 내며 돌아가는 인쇄기와 종이를 실어 나르는 수레 달린 오토바이와 지게차가 더 많았습니다. 주말 오후가 되면 사람 소리가 나는 곳은 오직 만년필 연구소밖에 없었습니다.

건물 4층에 위치한 4평 남짓 연구소엔 이미 일찍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복도는 물론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만년필 이야기로 말 그대로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날은 여느 때보다 만년필을 수리하러 온 사람들이 배는 더 많았습니다. 아마도 주중에 신문이나 방송에 연구소가 나왔던 모양입니다. 이런 주말은 특색이 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도 찾아오신다는 점입니다. 평소엔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젊은이들 방문이 대부분입니다.

 
파커45. 1980년대 학생들이 가장 갖고 싶었던 만년필

​그분 역시 한 손엔 신문을 오려 들고 계셨고 다른 손에 만년필이 있었습니다.
만년필은 몽블랑. 한 번도 쓰지 않은 새것이었습니다. 10배 확대경으로 펜촉도 보고 뚜껑도 열어본 다음 “선생님, 이 만년필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요.”라고 말씀 드렸더니. “아 글쎄 잉크를 어떻게 넣는 거요?” 연구소는 순간 조용해졌습니다. 연구소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기초적인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올라 이 방식을 접한 분들은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1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서독제 수퍼 로탁스(Super Rotax)’를 가져와 “이 만년필은 삼촌이 준 것인데, 잉크 넣는 방식이 달라 펜촉을 담그고 뒤에 있는 꼭지를 돌리면 잉크가 들어가 어때,신기하지?”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만년필들은 손잡이 아래 몸통을 열고 스포이트 역할을 하는 고무튜브가 있는 장치를 꾹꾹 누르면 잉크가 들어갔습니다. 이런 방식은 에어로메트릭(Aerometric) 또는 스퀴즈 타입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던 것은 물론 가장 유명했던 미제 파커45와 제가 갖고 있던 국산 만년필 역시 이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만년필 하나를 꺼내 잉크를 넣으면서 “이 만년필은 1930년대에 나온 독일제 펠리칸 100이라는 만년필로 뒤에 있는 꼭지를 보면 화살표가 하나 그려져 있는데, 화살표의 의미는 펜촉을 담그고 화살표 방향으로 꼭지를 돌리면 잉크가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화살표는 1940년대가 되면 사라집니다.”

1930년대 펠리칸 100과 꼭지에 있는 화살표

"이 몽블랑 만년필에 이런 화살표가 있었으면 선생님도 쉽게 잉크를 넣으셨을 텐데요.” “어찌 됐든 입(펜촉)으로 먹고 입(펜촉)으로 나오는 것은 똑같습니다.”어르신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환한 얼굴로 연구소를 나섰습니다.

1931년 콘클린 노작 만년필 광고.
이 역시 잉크 넣는 방법을 꼭지 상단에 새겨 넣었다.

​이 방식을 피스톤 필러라고 합니다. 1929년 독일 펠리칸사(社)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 방식은 고무색(rubber sac)이 들어간 이전 방식보다 같은 크기라면 잉크가 더 많이 들어가 독일과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만년필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도 1931 콘클린사(社)에서 노작(Nozac)이라는 모델에 채택되어 출시되었는데, 미국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도 몽블랑을 가져오신 어르신처럼 잉크를 넣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나봅니다. 얼마 가지 않아 노작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고, 1940년대 후반 위에서 말씀드린 방식인 에어로메트릭 방식의 파커51이 대히트를 하자 미국에서 피스톤 필러 방식의 만년필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만년필 회사들인 파커, 셰퍼, 워터맨사(社) 등은 지금까지도 이 피스톤 필러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현재 고급 만년필의 대명사가 된 독일의 몽블랑과 펠리칸, 이탈리아 오로라 등은 이 방식을 계속 채택. 수십 년 후가 되겠지만 만년필 세계의 주도권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옮겨지는 시작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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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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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혁 (1.XXX.XXX.252)
최근에 오노토라는 만년필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몽블랑처럼 펜에는 아무런 표시도 되지 않았지만 설명서나 광고에서는 친절히 그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설명을 되게 잘 해두었더라고요 ^^ 펜은 직관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이 지나치지 않고, 거기다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면 그것이 만년필의 가장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구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곳이 좋아하는 곳인 것도 그런 점인것 같습니다 :) 그리워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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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18: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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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 (223.XXX.XXX.45)
아.. 연구소의 풍경이 그려지는 하루입니다.
이런 일상이 소중해질줄은 그때는 알지못했네요.
하나 하나 알아가는 소중함과 사람들의 만남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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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14: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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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175.XXX.XXX.208)
누구나 처음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만년필을 사용하기 전에는 뒤를 돌려서 잉크를 넣는 펜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가장 비슷한 것이라고 해봐야 돌돌 돌리는 플라스틱 배럴 색연필이었을까요. 잉크 넣는 법을 배우신 분께서 그 뒤로 펜을 즐겁게 사용하셨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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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1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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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i (125.XXX.XXX.203)
단순하게 생각하면 풀리는 게 참 많은 세상이네요^^ 굳이 복잡하게 어렵게, 그런 방식이 늘 정답은 아닌데 살아가다보면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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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13:2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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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an (211.XXX.XXX.174)
지금은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당시에는 엄청 새롭고 충격적이었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또 생각해 볼 거리를 주셨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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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10:51:33
1 0
차상욱 (112.XXX.XXX.86)
만년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녀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이런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이 솔솔한 재미인듯 합니다. 그 많은 필링중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이 피스톤필러라고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나오는 컨버터도 분리가능한 피스톤필러가 아닌가 이건 저의 생각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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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10: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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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106.XXX.XXX.15)
만년필의 특성을 한마디로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입으로 먹고 입으로 잘 흘러 나와야 하는 그 특성을 거스르면 탈이 나겠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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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1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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뺙뺙이 (118.XXX.XXX.109)
입으로 먹고 입으로 나온다는 말이 참 단순하지만 셀프필링 이후의 만년필 특색을 잘 나타내는 말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사용하고 있어 못 느꼈지만 생각해보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피스톤 필러의 모습은
알지 못했더라면 사용하기 어려울 수도 있구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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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09: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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