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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사랑,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꽃, 산국(山菊)
박대문 2020년 11월 13일 (금) 02:09:27
 
산국(山菊) (국화과) 학명 Dendranthema boreale​

아스라이 높아만 가는 늦가을 하늘은 푸르다 못해 암청색(暗靑色)이 배어나고 땅 위의 온갖 푸르름은 빛을 잃어 누렇게 쇠잔해가는 계절입니다. 아득히 높은 하늘 아래 피어난 산국의 꽃 무더기를 보니 「천자문(千字文)」의 첫 구절, 천지현황(天地玄黃 :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이 떠오릅니다. 이 구절을 처음 알게 된 어린 시절부터 그 뜻이 묘연하여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이 가을에 산국 앞에 서니 불현듯 바로 지금과 같은 하늘과 땅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미칩니다. 올가을은 예년과 달리 왠지 암울하고, 을씨년스럽고 가슴이 시리니 하늘도 검고 땅이 누렇게만 보이나 봅니다.

​올 한해는 참으로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해였습니다. 연초부터 불어 닥친 코로나 19의 대유행으로 일상 활동과 여행이 제한되었습니다. 지난날의 소소한 일상이 특별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일상의 행복을 잃어버린 채 맞이하는 가을 역시 마냥 삭막합니다. 통상적으로 익혀온 옳고 그름에 대한 세상사의 뒤바뀜도 유별났습니다. 우리 사회에 합리성과 순수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말, 글, 행동의 뻔뻔함과 망령(妄靈)됨이 날이 갈수록 우심해지니 서글픔도 함께 깊어갑니다.

​어느덧 가을 끝자락! 빈 하늘 아래 산국의 꽃 무리가 청초한 자태와 맑은 향을 드리웁니다. 요사(妖邪)한 인간사와 달리 흐트러짐 없는 자연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제 길을 이어가나 봅니다. 메마른 소슬바람에 초목은 시들어가고 낙엽 진 숲속의 그림자 엷어져 그늘 깊은 곳에도 가을 햇살 파고드니 풀덤불에 묻혀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 산국이 마냥 반갑습니다. 긴긴날 숲 그늘에서 꽃 피울 날 기다렸기에 저무는 계절이 아쉬운 듯 꽃을 무더기로 피워 올립니다. 노란 꽃잎이 햇살 받아 화사하게 빛나고 감미로운 산국 향이 바람에 날리니 이미 가을이 깊었나 봅니다.

​감미롭고 따스한 햇볕 속에 다투어 피어나던 온갖 꽃이 다 시들어가는 차가운 계절에 어려움을 이겨내고 피운 꽃입니다. 무서리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가상한 기개와 굳센 의지가 돋보이는 꽃입니다. 풀꽃 시든 차갑고 황량한 벌판에서 지치고 배고픈 벌, 나비에게 마지막까지 꿀과 향을 베푸는 정경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 앞에 서니 은은하게 감도는 국향(菊香)이 가슴을 달구고 새 힘이 솟는 듯합니다.

 
천지현황의 산국(山菊) 꽃 무리

산국은 전국의 산과 들에 흔하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들국화의 한 종류로서 개국화라고도 합니다. 산천에 초록빛 가득한 계절에는 드러내지 않다가 가을이 되면 산기슭의 비탈과 계곡, 개울 언저리에 무리를 지어 꽃을 피웁니다. 이른 봄에 싹이 터서 햇볕 좋은 봄, 여름 다 보내고 늦가을 서리 내릴 때쯤에 노랗고 자잘한 꽃을 올망졸망 무더기로 피워냅니다. 첫눈이 내리는 시기에도 핍니다. 이를 보고 예부터 시인 묵객이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꽃, 충절의 꽃으로 칭송하며 좋아했던, 가장 한국적인 우리 야생화입니다.

​늦가을 벌판에 노랗게 핀 야생 국화에 산국과 감국이 있습니다. 산국(山菊)은 감국(甘菊)보다 꽃의 크기가 작고, 꽃의 수가 2~3개씩 달리는 감국과 달리 꽃이 다닥다닥 많이 달립니다. 맛을 보면 감국은 단맛이 있고 산국은 쓴맛이 납니다. 산국은 주로 산이나 양지 녘에서 자라는데 감국은 바닷가나 그늘진 곳에서 자라며 개체 수가 적어 내륙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산국의 꽃말은 ‘순수한 사랑’입니다. 서릿발이 성성한 계절에도 꿋꿋이 피어나 ‘충절의 꽃’이라고도 합니다. 순수와 상식이 퇴색해 버린 암울한 세상에 내 편, 네 편으로 딱 갈라져 힘과 세(勢)로 정의(正義)가 정의(定義)되고 위선과 교만을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둘러대는 참으로 뻔뻔한 세상에 순수와 충절의 들꽃 앞에 서니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내가 하면 바른말, 남이 하면 막말, 아전인수에 몰두한 온갖 술책과 거짓, 협잡, 되씌우기가 일상처럼 벌어지는 세상에서 산국이 내포하는 것과 같은 ‘순수’와 ‘충절’을 바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동일 사안을 놓고 보는 시각이 진영에 따라 어찌 이리도 다를 수 있을까? 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절단의 상반된 보고가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요즈음입니다. 알게 모르게 말도 못 하고 한쪽 무리에 휩싸여 가고 있는 나 자신부터가 측은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그런데도 늦가을에 곱게 핀 산국의 꽃 무리를 대하니 혹한의 시기를 꿋꿋이 참고 넘겨 새봄이 되면 따스한 날이 오듯이 사람 사는 세상도 변할 날이 오리라는 기대가 생깁니다. 더욱 희망적인 것은 편 가르기와 진영 논리의 막말, 적대감이 결코 바른길이 아님을 멀리 해외에서나마 입증하니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도 상호 간에 입장을 배려하고 국론 분열의 폐해가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2020. 10 월 남한산성 성곽길의 산국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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