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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오와 유리디체, 그리고 몬테베르디
허찬국 2020년 10월 28일 (수) 00:00:21

올봄 코로나19로 공연이 무산된 유명 연주단체들이 과거 공연 실황을 스트리밍하기 시작했는데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의 오페라 ‘오르페오(L’Orfeo)'를 유튜브에서 본 것은 이때였습니다. 작곡자의 탄생 450주년을 맞아 2017년 베니스의 한 극장(Teatro La Fenice)에서 열린 기념 공연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그리스 로마 신화인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줄거리입니다. 만물을 감동시키는 음악적 재능을 지닌 오르페우스가 죽은 신부 유리디체를 찾아 지하세계로 내려갑니다. 음악의 힘으로 황천(黃泉)의 존재들을 감동시켜 신부를 지상세계로 데려갈 수 있도록 허가를 얻지요. 뒤따르는 유리디체를 돌아보지 말아야 된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지상세계 코앞에서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봐 유리디체를 다시 잃어버리는 비극적 전설입니다. 한국의 견우직녀 설화와도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습니다.

몬테베르디

1607년 초연된 이 작품은 현대적 오페라의 시조라고 평가되고 있으며 작곡가 몬테베르디는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칭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그 이후 ‘오페라는 이탈리아 음악’이라는 인식을 심는 데 기여했고, 르네상스 시대에서 바로크 시대를 잇는 음악사의 중요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잊혔다가 20세기 초 재발견된 이후 세계 각국에서 자주 공연되고 있습니다.

작곡자의 영향력을 방증하는 것이 그의 이름을 딴 영국의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그 기념 공연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지휘자로 악단을 이끄는 가디너 경(Sir John Eliot Gardiner)이 1974년 이탈리아 합창곡을 영국에 알리기 위해 창단하며 출범했고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요. 바로크 음악, 특히 바흐의 성악곡들을 당시의 원전 악기로 반주하는 연주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오페라 공연 시 지휘자와 관현악단은 객석에서 잘 보이지 않는 무대 앞 半지하 오케스트라 피트(pit)에 위치하지요. 오르페우스 공연에서는 지휘자와 기악주자들도 성악가들과 같은 무대에서 공연을 합니다. 성악가들은 무대 뒤편 단상과 오케스트라 사이의 제한된 공간을 활용합니다. 3막에서 오르페오가 망자의 땅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황천강(Styx)의 뱃사공에게 호소하는 ‘힘찬 정령이여(Possente spirito)’ 아리아 외 노래가 아름답고, 보통 배경이나 줄거리를 알려주는 말하기에 가까운 서창(recitative)들도 멜로디가 풍부해 노래와 다름없습니다.

황천의 지배자 하데스(또는 풀루토), 오르페오를 동정하는 하데스의 아내 프로세르피나, 그리고 오르페오의 노래들은 역할에 적절하고 극적입니다. 18세기 중반에 오스트리아 작곡가 글루크도 같은 신화로 오페라 ‘오르페오와 유리디체’를 썼습니다. 거기에도 황천의 존재들에 호소하는 부분에 절실함을 담은 아름다운 기악곡 ‘정령들의 춤’이 유명합니다.

필자는 몬테베르디 합창·관현악단을 약 10여 년 전 여름 런던의 로얄 알버트 홀에서 열린 BBC프롬 공연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20세기 중반 영국 공영방송 BBC가 19세기 말부터 계속되어 오던 고전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대중적 연주회의 운영과 방송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여름의 큰 행사인 이 연주회들을 묶어 BBC프롬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휴식시간 포함해서 두 시간가량 이어진 바흐의 칸타타 공연 내내 서서 관람했습니다. 보통 공연장에서 제일 비싼 자리가 있는 무대 바로 앞 구역인데, 그곳을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이나 음악애호가들을 위해 저렴한 가격의 입석 관람 구역으로 만든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요. 입석 관람을 해보았던 딸의 제안으로, 처음 참석한 BBC프롬에서 해본 흥미로운 체험이었습니다. 그 이후 인터넷에서 가디너가 이끄는 몬테베르디 악단의 바흐 성악곡 공연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새라 럴의 유리디체

몬테베르디의 BBC프롬 공연 관람 몇 년 전인 2006년 가을 이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연극을 미국 뉴헤이븐에서 보았습니다. 학기 중 딸의 학교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였는데 마침 그 학교와 연관된 예일 레퍼터리 극단(Yale Repertory Theater)이 미국 작가 새라 럴(Sarah Ruhl)의 2003년 작 '유리디체(Eurydice)'를 공연하고 있어 별생각 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원래 신화와 달리 유리디체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등장인물이나 무대 장치가 단순한데 특이하게도 유리디체의 아버지가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망계에 도착한 유리디체는 아버지를 만납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사망 후 5개의 강을 건너 황천에 도달하는데 그중 레테(Lethe)강은 망각의 강입니다. 지상세계를 까마득히 망각한 딸과 달리 레테강의 씻김이 불충분했던 아버지는 지상세계의 기억을 지니고 있어서 딸을 알아보고 거두어 언어와 과거사를 가르칩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상세계와 서신이 오가고, 셰익스피어 전집이 보내지는 등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결국 원래 신화에서처럼 오르페우스가 지하세계로 내려옵니다. 유리디체는 이제 오르페우스와 지상세계로 귀환할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강권으로 오르페우스의 뒤를 따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앞서가는 오르페우스를 불러 돌아보게 하여 두 번째 죽음을 맞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자발적으로 레테강 물로 씻은 후 바닥에 눕습니다. 망계로 돌아온 유리디체에게 지하세계 두목은 자신의 신부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그녀는 오르페우스와 그의 새 신부에게 편지를 쓴 후 자신도 레테강 물로 씻고 아버지 옆에 드러눕습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엄청난 물이 쏟아지며 오르페우스가 등장합니다. 레테의 물로 확실히 씻은 그는 유리디체의 편지를 읽지 못하며 연극은 끝납니다.

10대 때 곁을 떠나며 딸에게 정서적 충격을 준 것에 대한 마음의 짐이 컸던 터라 무심코 본 연극의 충격에 먹먹해하던 일이 생생합니다. 예술 작품들은 이렇듯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 사랑, 슬픔, 그리움, 회한을 담아내고 다시 우리에게 보여주지요. 하지만 정태적이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가 몬테베르디에 의해 다듬어져 더 빛나고, 새라 럴이 새로운 옷을 입혀 변신하는 것처럼 끊임없는 재창조 과정을 겪습니다. 이런 값진 일에 매진하는 동서고금 예술가들은 매우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몬테베르디 2017년 오르페오 공연 실황 유튜브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rSGK7vn1I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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