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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공원의 명물, 억새와 야고에 어리는 상념
박대문 2020년 10월 14일 (수) 00:00:04
   
야고 (열당과) 학명 Aeginetia indica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고복수의 ‘짝사랑’이 절로 나오는 가을이 한창입니다. 하늘이 맑은 날 아침, 상암동 하늘공원 291개의 나무계단을 올라 바다처럼 펼쳐진 초록 억새밭을 찾았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계단 옆에 쭈뼛쭈뼛 피어나는 야생의 꽃들이 고개를 내밉니다. 가막사리, 애기나팔꽃, 유홍초, 낭아초, 진득찰 등 누가 가꾸지도 않은 꽃들이 앙증맞게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소박하고 청초한 야생 꽃들을 즐기면서 올라도 계단이라서 숨이 가쁩니다. 마스크를 써야만 하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른 봄부터 불어닥친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지나친 올해의 봄, 여름이 나를 울립니다. 입에 재갈 물리듯 마스크를 써야만 사람 앞에 나설 수 있는 세월입니다. ‘정언(正言)도, 상식도 소멸한 세상이니 말하지 말고 살라.’는 하늘의 뜻인가 봅니다.

어느덧 푸른 잎새에 은행알 도드라지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이 좋은 계절임에도 마스크를 쓰고 헉헉대면서 힘들게 계단을 오르며 찾아온 하늘공원은 어떠한 곳인가? 이곳은 1978년부터 1992년까지 15년 동안 서울 시민의 쓰레기가 몽땅 모이는 ‘난지도 쓰레기장’이었습니다. 약 1억4천만 톤 규모의 쓰레기 더미가 쌓여 만들어진 해발 98m의 봉우리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쓰레기 산이었습니다. 파리, 먼지, 악취가 진동한 지옥 같은 땅이었지만 한때는 이곳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먹고 있는 꽁보리밥 점심 그릇에 파리가 하도 많이 달라붙어 새까맣게 파리만 보이는 밥그릇을 손으로 휘휘 저어가며 식사를 하던 그 모습이 참담했습니다. 참혹한 환경과 악취 풍기는 쓰레기장이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모여든 2천~3천 명 정도가 삶을 지탱하는 생존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쓰레기를 줍는 순위에 따른 호칭, 소위 ‘앞벌이’, ‘뒷벌이’가 그들입니다. 쓰레기차가 들어와 쓰레기를 비우면, 힘세고 기득 세력인 '앞벌이'들이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먼저 줍고 난 이후에 그 쓰레기 더미를 이삭 줍듯 다시 뒤지는 사람들이 '뒷벌이'입니다. 앞벌이의 선심에 따라 뒷벌이의 수익이 달라집니다. 이 순서는 준엄했고 앞벌이가 되기 위해서는 권리금도 필요했습니다. 이 암울한 기억밖에 생각나지 않는 이곳을 다시 찾게 만든 것은 하늘공원의 억새밭입니다.

이토록 추악하고 참혹했던 ‘난지도 쓰레기장’이 탈바꿈한 하늘공원이 지금은 서울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월드컵 유치를 계기로 1996년부터 평화의 공원을 비롯해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공원, 난지한강공원의 5개 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이른 봄부터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고 한여름의 초록빛 억새가 장관입니다, 가을에는 바람에 살랑대는 하얀 억새 물결이 아름다워 하늘공원에서는 2002년부터 매년 가을이면 억새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늘공원의 억새가 이곳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억새에 더하여 꽃쟁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으니 바로 하늘공원 억새밭의 야고입니다.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오르며 하늘공원을 아등바등 찾는 이유도 바로 억새에 붙어 자라는 기생식물, 야고를 만나기 위함입니다.

 
억새 뿌리에 붙어 자라는 제주의 희귀 기생식물 야고

야고는 열당과의 기생성 한해살이풀입니다. 억새 뿌리에 붙어 양분을 얻어먹고 자라기에 잎이 필요 없는 식물입니다. 억새꽃이 피는 가을에 연노랑 빛을 띠며 솟아나는, 털이 없고 매끈한 꽃줄기 끝에 연한 홍자색 꽃이 옆을 향하여 핍니다. 열매는 삭과(蒴果)입니다. 꽃이 옆을 향하여 기역자 모양을 하고 있어 마치 담배를 피우는 곰방대와 비슷하여 담배더부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국내에서는 제주도 한라산 남쪽의 억새밭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인데 어느 날 갑자기 옛 쓰레기장에 조성한 서울의 하늘공원 억새밭에 야고가 나타났으니 명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제주 한라산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하늘공원에서 희귀식물인 야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만 있고 육지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진 야고가 어떻게 인공으로 조성된 하늘공원에서 자랄 수 있게 되었을까? 하늘공원에 옮겨 심은 억새는 전국에서 수집한 것인데 그중 제주도 억새에 씨앗이 함께 따라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자라지 않아 키울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서는 쓰레기 매립에 의한 가스의 발생으로 지면의 온도가 제주 한라산과 비슷한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뿐입니다.

육지와 멀리멀리 떨어진 남녘 땅 제주에서 뜻하지 않게 딸려와 생소하고 차가운 땅, 서울의 하늘공원에 자리 잡아 여리디여린 꽃줄기를 내밀어 씨앗 맺고 대(代)를 잇는 야고의 끈질긴 생명력을 봅니다. 기세등등하게 활짝 팔을 벌리고 태양 빛을 가로채는 억새의 그늘에 숨죽여 몸 숨기고 겨우겨우 생을 의지하다가 억새꽃 필 무렵 반짝 틈을 타 여린 꽃줄기 뽑아 올려 후대를 잇는 하늘공원의 야고입니다. 우거진 억새밭과 여린 색깔의 가냘픈 꽃줄기에 한 서린 듯 피어난 야고 꽃송이! 버려진 땅,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주어진 생명이기에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으로 살다간 앞벌이, 뒷벌이의 혼과 넋이 억새와 야고로 피어난 것은 아닐까? 하늘공원의 억새와 야고를 보니 80년대 난지도 쓰레기장의 서글픈 광경이 아련한 그림처럼 스쳐 갑니다. 세상사 어려워도 모질고 질기게 살아가는 것이 생인가 봅니다.

          하늘공원의 억새와 야고

     세월 흘러 되돌아온
     난초, 지초 어우러진 땅.
     억새 나불대고, 야고 삐죽 솟는
     하늘공원 억새밭.

     한때는 절망 속에서 꿈을 캐는
     처절한 삶의 몸부림 터였다.
     모든 삶터에 순위가 있듯
     그곳 또한 앞벌이, 뒷벌이가 있었다.
     지금은 불야성 빌딩 숲속의 귀한 초록 섬.
     태양 빛 가득 안은 억센 억새 숲과
     소롯이 고개 쳐든 해말간 야고가 있다.

     야성(野性) 넘친 힘센 앞벌이는
     태양 빛 가로채는 억새가 되고
     힘 부쳐 나약한 뒷벌이는
     억새에 붙어사는 야고가 되었나 보다.
     흘러간 모진 생의 넋인가 싶다.

(2020.9.25 상암동 하늘공원 억새밭에서)

-끝-

ps: 하늘공원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9월 26일부터 11월 8일까지 44일간 출입이 제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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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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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59.XXX.XXX.175)
아는만큼 보인다더니, 박선생님 글을 읽으며 소중한 시각과 야고라는 한해살이 풀을 배웠습니다. 마침 어제 제주에서 돌아왔는데 새별오름과 산굼부리에 오르며 억새 장관을 만났지요. 아, 멋지다!하면서도 겨우 억새와 갈대의 차이점이나 궁금해하며 증명사진들 찍어댔지만, 야고는 볼 안목이 없었네요.
하늘공원에 가보려다가 11월 8일까지 제한된다니... 제한 하루 전에 가서 시상을 다듬으신 박선생님의 擇日眼(이런 말이 있나?)도 역시 아는만큼 즐길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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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5 16:2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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