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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김영환 2020년 09월 04일 (금) 00:00:23

장마가 시작되기 전 윗마을 아주머니들이 지나가다가 내가 일군 밭을 보면서 “고추가 참 잘됐네” 하고 덕담했습니다. 얼굴이 다 엇비슷한 아주머니들이죠. 초등학교를 폐교할 만큼 인구가 줄었지만, 집성촌이라 일가붙이들이 살아서 남자들 이름은 돌림자가 많죠.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지내지만, 사회적 거리는 길도, 땅도 넓어 저절로 지켜집니다.

​옛날 유명 대학교의 사회학과에서 집성촌을 연구하러 찾아왔었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던 노인이 작년 인지장애로 한밤에 해변에 나갔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밭일하는 내게 그는 유럽 여행담을 들려주면서 “내년엔 꼭 인삼 심어. 잘 가르쳐 줄게. 나도 인삼 길러 아들 대학까지 보냈잖아”라며 아들이 K대 출신임을 또 자랑했습니다.

​시골 생활의 인정은 메마른 도회지와 다르죠. 밭에서 일할 때 지나가면 "뭐 하세요?“ "어디 가세요?"라고 꼭 주고받죠. 농사 이야기로 말이 길어질 때도 있습니다. 파란색 포터를 몰고 바닷가 밭으로 내려가는 농부도 눈이 마주치면 차창에서 고개를 끄떡합니다.

​아주머니들의 고추 인사에 나는 대견한 고추를 매만지면서 “끝 가봐야 알죠.”라고 자신 없이 대답했고 아주머니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공감을 나눴습니다. 그게 농사만은 아니란 것이 요즘 드러납니다.

​이내 장마가 시작되었고 8월 초순 해가 반짝하던 날 첫물을 따서 비닐하우스 안의 검정 고추 망 속에 널어놓았습니다. 며칠 뒤 밭두렁 가의 몇 그루가 탄저병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탄저는 아주 어린 풋고추건, 빨간 고추건 거무튀튀하게 썩어 들어가고, 마른 것은 잿빛으로 흉하게 부스러지게 하는 강력한 병이죠. 병을 옮기지 말라고 몇 포기 뽑아내며 “도시의 코로나를 피해 온 시골 고추밭엔 탄저병인가?”하고 한탄했습니다. 늘 어린이날에 모종을 심었는데 올해는 좀 이른 5월 1일 심은 게 일렀나 하는 후회도 들었죠. 식물이란 묘해서, 옥수수도 단 며칠 상관에 낟알이 딱딱해지고 껍질이 두꺼워집니다.

​고추가 탄저병에 걸리면 대책이 없어 온갖 약을 치다가 지쳐서 결국 될 대로 되라 하며 방치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고추는 11월까지 하얀 꽃을 피우다가 서리가 내려야만 비로소 한살이를 마감합니다. 심은 지 넉 달이 다 되어 가는 이제, '땀방울을 흘리며 풋고추도 안 따고 애써 키웠는데 포기 못 하지’, 오기가 생겼죠. 10월 중순까지도 빨간 고추가 달리는 그때를 바라보며 약통을 지고 분무기로 약을 뿜어댔습니다.

​물론 장마가 어서 끝나 어떤 약보다 잘 듣는 강렬한 햇볕이 탄저를 죽여주기를 바랐습니다. 기대와 달리 장마는 점점 더 길어졌고 어느 날 변색하는 희나리를 막도록 덮어놓은 고추 망 속에서 잘 말랐을 거라고 짐작한 첫물 고추가 모두 탄저병에 걸려 있어 탄식했습니다. 탄저병이 이토록 기승을 부리는 것은 하우스를 만들고 나서 1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탄저는 장마철의 후덥지근하고 바람이 안 통하는 환경을 좋아하죠. 올해는 일부러 1미터 간격으로 넓게 심고 통풍이 잘되게 가지도 부지런히 쳐주었는데요.

​탄저엔 특효약이 없습니다. 탄저만 아니면 고추 농사는 지을 만하다고들 말하죠. 농민들은 뭐가 잘 들을까, 농약 취급자의 말을 듣고 이 약 저 약 돌려가면서 칩니다. ‘농튜버(농사 유튜버)’들도 탄저를 언급합니다. 식염과 락스를 0.3퍼센트 농도로 뿌리면 즉효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탄저병을 그렇게 치료할 순 있겠지만 열매는 안 달린다는 댓글도 있었습니다.

​탄저의 발생 원인을 더듬어보니 물 폭탄으로 밭고랑에 물이 차자 물길을 트려고 이랑의 중간을 자른 것이 탄저의 통로가 된 모양이었습니다. 탄저병이 손쓸 수 없게 퍼져가자 며칠 걸려 병에 걸린 고추를 손으로 거의 다 따내고 검정 비닐 ‘멀칭(바닥 덮개)’ 위에 떨어진 잔해까지 쓸어 냈습니다. 발본색원이었죠. 버려야 할 병든 고추를, 찜통 무더위 속에서 요리조리 보며 따는 일은 고행이었습니다.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 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노인들이 이렇게 밭일을 하다가 열사병으로 가나?’ 갑갑한 방호복을 입고 더위 속에서 코로나 19와 싸우는 의료진의 모습도 떠올렸습니다.

​따버린 고추가 세 발 손수레로 다섯 개 정도 분량이 되었습니다. 저걸 온전히 말렸다면 몇 관이 되었을까? 며칠 전 만난 위 밭 아주머니는 작황이 좋아 고추를 XX만 원에 열 관을 팔았다면서 고추는 약을 흠뻑 치고 따자마자 건조기로 말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간의 노고가 아쉬웠지만 정성을 더 쏟지 못한 게 잘못이지요. 이건 약과입니다. 수만 주를 심었으나 탄저로 포기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고추의 탄저병도 고치지 못하는데 인간의 병은 얼마나 고치기 어려울까? 코로나 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사람 간의 전염은 없다고 낙관했던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의 수염이 떠올랐습니다. 영국의 연구진은 수백만 명 사망의 대재앙을 예고했었죠. 그 후 학질약이 듣네, 에이즈약이 듣네 하다가 나라마다 백신 개발에 열을 올리는 듯합니다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죠.

나는 친환경 태양초를 사랑합니다. 날만 좋으면 비닐하우스 속에서 사나흘에 투명하고 아름다운 태양초가 되어 속의 노란 씨까지 다 볼 수 있으니까요. 장마가 거짓말처럼 끝나 해가 며칠 빤할 때 널어둔 고추는 60도가 넘는 고온의 비닐하우스 속에서 금세 루비색으로 반짝였습니다. 한 개를 집어 코에 대봅니다.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납니다. 길을 잘못 든 벌레들이 날아들어 고추에 앉아 있습니다. "빨대를 꽂으면 단맛이라도 나냐?" 하고 물어봅니다. 사람이나 곤충이나 맛은 기막히게 잘 아는가요? 예년 수확의 10분의 1도 안 될 건(乾) 고추를 바라보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교훈을 깨닫습니다. 근거 없는 낙관론을 멋대로 펼치다가 '~와의 전쟁'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되새겨야 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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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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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115.XXX.XXX.194)
마리 님 안녕하세요? 정말 반갑습니다.
캐나다도 코로나가 굉장할 텐데 걱정입니다. 고추밭의 탄저는 이제 거의 정복이 되어 하얀 꽃들이 다시 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을 탓하지는 않습니다. 고추가 주인을 잘못 만나 악천고투했다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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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1 02:3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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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리 (24.XXX.XXX.207)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농사 정말 어렵지요.
정원일도 어렵고 힘든다는 걸 배웠는데 농사는 그게 생계로 하던
집에서 쓸 용도로 하던 일과 끝은 똑같아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도 얼마 거두셨다니 다행입니다
답변달기
2020-09-09 10: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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