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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필사(筆寫)
박종진 2020년 08월 31일 (월) 00:10:40

고대 그리스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등이 등장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24권이었습니다. 24권이라 엄청나게 길어 보이지만, 여러 장을 묶어 꿰매고 두꺼운 겉장을 붙인 요즘과 같은 책은 아니었습니다. 낱장을 연달아 붙이고 양 끝에 막대기를 단 두루마리였습니다. 보통 신약성서 한 복음서 정도의 분량이 기록되는 두루마리 한 개의 길이는 약 3m 정도였지만 심심치 않게 그 두 배가 넘는 것, 매우 드물게 10m에 이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값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리아스 전부는 긴 것과 짧은 것을 합쳐 24개의 두루마리이고, 지금처럼 글을 읽을 수 있다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책은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루마리가 되는 파피루스가 이집트에서 독점하던 수입품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활자가 없었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를 일일이 베껴야 하는 수고와 노력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수고와 노력? 실제로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가진 한글로 된 일리아스 제1권 약 20페이지를 베껴보니 꼬박 10시간이 걸렸고 어깨와 허리가 아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읽었던 책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 파피루스와 갈대펜 


“필경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것은 눈, 척추, 위장, 옆구리, 아랫배 등을 모두 상하게 한다.  아니 온몸을 아프게 한다. 마지막 문장을 필경할 때의 심정은 오랜 항해 끝에 항구로 돌아온 선원의 해방감과 영원한 은총을 받는 느낌이다.”   -실로스 베아투스 원고를 쓴 클로폰-

<출처:문자의 역사(조르주 장 지음/이종인 옮김. 시공디스커버리)>


​그런데 이 힘들고 어려운 필사가 취미가 되면 마술에 빠진 것처럼 재미있어집니다. 당연히 마술에 빠지게 하는 것은 만년필입니다. 일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 벼르고 별러 산 새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순백의 종이에 파란 잉크가 뾰족한 펜 끝으로 샘솟듯 흘러나와 힘들이지 않고, 방향만 바꾸어 주면 종이에 스며들며 사각사각 써지는 글씨는 한 줄 두 줄 차곡차곡 쌓여 한 페이지가 되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 필사한 <소나기>의 일부 

​“허허허 그걸 누가 모르냐고. 그 비싼 만년필이 없단 말이지.”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그건 옛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내 큰 문구점에 가면 커피 한 잔 값에 잘 써지는 만년필을 구할 수 있고 치맥(치킨과 맥주)을 한 번만 포기해도 평생 같이 할 수 있는 만년필도 살 수 있습니다. 잉크는 어딘가 잘 찾아보면 있을 것이고, 노트는 180도 잘 펼쳐지고 뒷면 박임이 적은 것을 고르면 됩니다. 사실 만년필은 굳이 비싼 것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1883년에 만들어진 워터맨 방식을 따르고 있고 쓰면 쓸수록 점점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래 써서 자기 손에 길이 나면 그 만년필이 가장 좋습니다. 너무 저렴한 것 중에 뚜껑이 깨지거나 밀폐가 떨어지는 것, 클립이 끊어지거나 탄력이 떨어지는 것이 있는데, 요즘 이런 것들을 취급하는 문구점은 거의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필사를 위해선 가늘게 써지는 것이 좋습니다, 만년필의 펜촉 굵기는 EF, F, M, B, BB 등으로 구분하는데 가장 가는 EF 펜촉을 사시면 됩니다.

​필사에 좀 더 탄력이 붙으면 새롭게 잉크를 사보는 것도 좋은데 너무 비싼 것보다 범용(汎用)으로 사용되는 것들 중에서 고르면 좋습니다. 파커, 펠리칸 등 만년필 회사에서 나오는 가장 저렴한 것이 제 경험상 가장 안전하고 품질도 좋았습니다. 주의할 것은 만년필 회사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글씨가 지워지지 않는 문서 보존용 잉크가 있는데, 이 잉크가 들어간 경우 좀 더 자주 세척을 해주면 됩니다. 세척을 할 때는 펜촉 만큼 뚜껑 안쪽도 중요한데, 물에 적신 면봉으로 꼼꼼히 닦아주면 만년필을 보다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베껴 쓸 책으론 시집과 단편과 중편이 지루하지 않고 좋은데 저는 중학교 교과서에 있었던 황순원의 <소나기>,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김승옥의 <무진기행>,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재미있게 필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추리소설은 성격이 급하신 분께는 금물(禁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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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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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106.XXX.XXX.216)
천천히 써야 한다는걸 알면서도 천천히 쓰기는 참 어렵습니다. 쓰다가 참지못해 다시 원래 속도로 돌아가버리고 글씨는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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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6 13: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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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필사는 숙제가 아니니까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 몇 글자 쓰고 만년필 보고 이렇게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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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9 08: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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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형 (180.XXX.XXX.174)
문방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글도 짧은 글들이 많이 소비되어 긴 글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즈음입니다.필사로 긴글을 쓰지는 않더라도 좋은 글귀들, 읽으면서 눈에 띈 글들을 옮겨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만년필에 대한 이해를 주심에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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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22: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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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0.XXX.XXX.254)
맞습니다. 최근에 <데미안>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 곧 필사를 해볼 생각입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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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1 15: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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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110.XXX.XXX.205)
해군에 있을 때 배가 항구에 들어와서 주말이 되면 좋아하는 책, PX에서 팔던 값싼 노트, 평소에는 일지를 쓰던 만년필 하나씩을 에코백에 넣고서는 멀리 있는 부대 도서관으로 가고는 했습니다~ 지금은 악필로 채워진 노트 한 권일 뿐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진이나 기념품보다 값진 추억거리인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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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20: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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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0.XXX.XXX.254)
저도 필사한 노트가 몇 권 있는데 볼 때 마다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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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1 15: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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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선 (39.XXX.XXX.115)
취미로는 재미있지만 일이 되면 고단한 것은 대부분 그런가 봅니다.
좋아하는 필기감으로 좋아하는 잉크를 넣어 쓴다면 어떤 글을 쓰든 즐거울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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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11:4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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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맞습니다. 그래서 좋은 종이, 잉크, 만년필에 대한 욕심이 끝없이 생기는 가 봅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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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12: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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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175.XXX.XXX.208)
몇 자 쓰면 다시 깎아야 하고, 걸핏하면 펜을 잉크병에 담가야 하던 시절의 필사가들은 힘 안 들이고도 잉크가 술술 나오는 만년필을 참 부러워했을 것 같습니다. 끝까지 필사한 것은 2번 밖에 없지만 다양한 만년필과 잉크를 맘껏 써 볼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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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10:5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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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어쩌다 좋은 노트, 어쩌다 좋은 잉크를 만나면 필사 욕심이 납니다. 깃펜이나 갈대펜을 써보면 정말 만년필의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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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12: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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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i (49.XXX.XXX.57)
가장 느린 독서가 필사라고 했던가요? 좋아하는 글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종이 위에 써내려가는 기분도 상당히 남다를 것 같네요.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느린 독서법이 참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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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8:5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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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좋은 표현 입니다. 정말 어려운 책도 쓰면서 읽다 보니 수월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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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9: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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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223.XXX.XXX.13)
필사를 한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이 글을 읽으니 너무나도 해보고싶어집니다. 지금 책상에 앉아서 시작해야겠습니다!! 오늘도 너무나 좋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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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8: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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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네. 맞습니다. 당장 시작이 중요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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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8: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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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88 (117.XXX.XXX.244)
필사를 즐기는 방법 중에 하나는 천천히 쓰는 겁니다.
악필의 대부분은 조급하게 씁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
평소 쓰는 속도의 반으로 써보세요.
글씨도 좋아지고 만년필의 필기감도 더 부드러워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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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8: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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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좋은 필사팁 고맙습니다. 저도 천천히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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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8: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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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110.XXX.XXX.22)
필사를 하면서 글을 더 음미하고 만년필이 길들여지는 시간이 요즘처럼 나가기 힘든 시기에 좋은 힐링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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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7: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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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만년필이 길들여지는데 필사가 최고인 것 같습니다. 지금 갖고 있는 만년필 중 필사를 가장 많이 한 파커45가 필기감이 가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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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7: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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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106.XXX.XXX.29)
취미로서의 필사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동반자로서 만년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되겠군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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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7: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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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맞습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필사가 많은 도움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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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7:3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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