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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연출, 맥아더 주연
박종진 2020년 07월 31일 (금) 00:58:48

 

1945년 5월 7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 낸 후 파커 51 만년필 두 자루로 승리를 뜻하는 V자를 만들어 보인 것을 보고 맥아더 장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두 사람의 관계는 12년 전인 1933년부터입니다. 맥아더는 육군 참모총장, 별 네 개 4성 장군이었고, 아이젠하워는 소령이었습니다. 열 살의 나이 차이에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의 선후배 사이. 요즘말로 “초격차”가 이 둘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후 약 7년간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부관(副官)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4년 12월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따라잡혔습니다. 이틀 먼저 맥아더가 진급했을 뿐 나란히 5성 장군인 원수(元帥)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만년필로 V를 만든 것을 멋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옥수수파이프와 필리핀 원수모(帽), 선글라스를 자신의 상징으로 표현하는 탁월한 능력까지 갖고 있었으니까요. 기회는 곧 찾아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라디오를 통해 종전을 선언하였고, 9월 2일에 항복문서 조인식을 열기로 정하였습니다.

오전 9시경 도쿄 만에 정박해있는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艦上)에서 녹색 보가 깔린 직사각형의 테이블에 두 개의 항복문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독일 항복 문서 조인식과 마찬가지로 엄숙했지만, 자기 만년필로 서명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졌습니다. 먼저 서명을 한 두 명의 일본 대표는 모두 자기가 가져온 만년필로 서명하였습니다. 참고로 독일이 항복할 때 독일 대표는 아이젠하워 원수의 만년필로 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조인식의 주인공인 맥아더 원수의 차례가 왔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다섯 자루의 만년필을 주머니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한 걸음 뒤에는 웨인라이트 장군과 퍼시벌 장군이 서 있었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총 6개 만년필로 서명했습니다. 다섯 자루와 아내에게서 빌린 빨간색 만년필 까지. 첫 번째 만년필은 필리핀 전선을 떠날 때 남겨놓아 포로가 된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두 번 째는 싱가포르 전선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퍼시벌 장군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녹색 테이블에 눈에 확 띄는 빨간색 만년필이었습니다.(녹색의 보색(補色)은 빨간색입니다.) 그 뒤로 영국 등 연합국 대표들이 서명하고 이 조인식은 끝나게 됩니다. 만년필 역사에 길이 남을 맥아더 연출, 주연의 이 장면은 맥아더 원수의 마음에 꼭 들었을 것입니다.

1945년 9월 2일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맥아더 원수 (바로 뒤에 손에 만년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웨인라이트 장군, 그 옆은 퍼시벌 장군). -출처 위키디피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장면이 꽤나 불편했을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원수일까요? 아닙니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아이젠하워 원수는 맥아더 원수를 오래전부터 뛰어난 배우(俳優)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놀라지도 불편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서명을 하고 만년필 등 펜을 나눠 주는 것은 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하는 행위였습니다. 지금도 가끔 외신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나 오바마 대통령이 여러 사람에 둘러싸여 여러 자루의 펜으로 서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서명 후 대통령은 이들에게 펜을 하나씩 나눠 줍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逝去)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된 미주리 주(州) 출신의 트루먼 대통령입니다. 조인식의 무대가 된 전함 미주리호는 진수식(進水式) 때 미국 전통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의 딸인 마가렛 트루먼이 샴페인을 깨트린 배이기도 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전함 미주리를 이 조인식에 보내 자신의 입지도 강화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1951년에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의 해임, 이것이 인기의 하락으로 이어져 1952년 트루먼 대통령의 재선 포기는 이 조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1952년 아이젠하워 원수는 공화당 후보로 출마,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현직 대통령이 좋아하는 만년필인 파커51로 서명합니다. 아이젠하워 연출, 마크 클라크 주연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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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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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혁 (58.XXX.XXX.26)
화려한 이벤트를 연출하고 주연까지 맡았지만, 결국 시대의 정점에 오른 사람은 비교적 수수했던(?) 후배라는 점이 참 오묘한것 같습니다 :)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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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1 00: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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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75.XXX.XXX.86)
저도 그점을 강조 하고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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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1 22: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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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175.XXX.XXX.208)
지금은 물어볼 길이 없는 역사속 인물의 속내를 만년필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게 재밌습니다. 요즘처럼 자기 표현의 창구가 다양한 시대가 아니었던 만큼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기술도 더 필요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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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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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75.XXX.XXX.193)
언제나 그 사람의 물건은 그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그 중 만년필은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사람을 표현합니다. 속내를 들키기 싫은 사람에게 만년필은 위험한 물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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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19: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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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211.XXX.XXX.3)
만년필이라는 훌륭한 도구를 쓰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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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0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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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맞습니다. 만년필 아무리 휼륭해도 결국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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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08: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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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110.XXX.XXX.95)
만년필을 통해 역사를 배우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배우게 되네요;)
또 다른 역사적인 사건 속 펜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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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07: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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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관련책도 많이 보고 했는데 역시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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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07: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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