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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의 매력
박종진 2020년 06월 08일 (월) 00:12:53

-옛날에는, 사내들이 외모도 준수하고 크기 또한 엄장(嚴莊)했다. -<출처: 장미의 이름으로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도서출판 열린책들)>

위 내용은 프롤로그 편 넉 장을 넘기면 나오는 왼편 두 번째 줄인데, 저는 이 문장에 홀딱 반했습니다. 왜냐면 ‘사내’를 만년필로 바꾸면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에 꼭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자마자 독서를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는데 수많은 만년필들이 융단처럼 펼쳐졌고, 그중 몇 개는 코앞으로 다가와 둥둥 떠 있었습니다. 그 녀석들은 워터맨사(社)의 3대장(大將)과 셰퍼 라이프타임(Sheaffer Lifetime), 파커51(Parker'51'),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9(Montblanc Meisterstück 149)로 이 글에 나와야 할 만년필들이었습니다. 

워터맨의 3대장은 58, 패트리션(Patrician), 헌드레드 이어(Hundred year)입니다. 이들 중 58은 한마디로 <장미의 이름으로>의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입니다. 눈길을 끌 만큼 준수했고 다음 세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습니다. 58의 뜻은 5는 셀프필러, 잉크나 물을 옮기는데 필요한 기구인 스포이트 없이 잉크를 넣을 수 있는 잉크 충전기관이 있고, 8은 8호 펜촉을 달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시 워터맨의 최상위 라인이었습니다. 자동차로 치면 벤츠S시리즈, 현대의 G90시리즈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58은 1915년에 나왔고 당대에 이 만년필을 상대할 수 있는 만년필은 없었습니다. 단연 워터맨의 최전성기에 가장 어울리는 만년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굵고 붉은 게 워터맨 58, 노랗고 작은게 워터맨 패트리션 

 

 
워터맨 헌드레드 이어 1941년 
 

1929년에 나온 귀족이라는 뜻의 패트리션은 이름처럼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58보다 작았고 엄장한 느낌은 없었습니다. 마치 58이 윌리엄 수도사 역할을 맡은 숀 코너리라면 패트리션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습니다. 마지막인 헌드레드 이어는 GUARANTEED FOR A CENTURY 백년을 보증한다는 거창한 이름을 가졌지만, 앞의 두 만년필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습니다. 1939년 1세대, 1940년 2세대, 1941년 3세대, 1942년 4세대, 1년마다 디자인이 바뀌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관심을 못 받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워터맨에 비해 후발 주자인 셰퍼, 파커, 몽블랑은 크기와 모양보다는 금(gold)을 적게 사용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1920년 첫 등장한 셰퍼의 라이프타임 만년필은 평생보증에 걸맞게 아주 두꺼운 펜촉을 만들어 만년필에 끼웠습니다. 길이는 손가락 한마디 반 정도에 두께는 제 엄지손톱보다 더 두꺼워 책상에서 떨어지면 마루에 꽂힐 정도였습니다. 무게는 약 1.5그램. 그런데 이 펜촉이 해가 가면서 다이어트하듯 무게가 줄었습니다. 곧 1.4g으로 줄었고, 다시 1.3, 1.24 이런 식 이었습니다. 0.1g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수가 100만개라면 10만 그램, 14K 금 100kg 요즘 금 시세로 환산하면 약 38억 5천만 원(14K 금 1g 66,000원X14/24)이나 되는 큰돈 입니다.  

셰퍼 라이프타임 펜촉들   
 
아래 1920년대 이후, 중간 1924~1926년, 위 1926년 이후  
 
 
왼쪽 1920년대 이후, 중간 1920~1926년, 오른쪽 1926년 이후 점점 얇아지는 펜촉   
 

파커의 금 빼내기는 좀 더 창조적이었습니다. 1941년에 출시된 파커51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펜촉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파커는 뚜껑에 들어가는 금까지 줄였습니다.   

1/10 16K GOLD FILLED – 1943년 산 
1/10 14K GOLD FILLED – 1947년 산 
1/10 12K GOLD FILLED – 1950년대 산 

위의 것들은 이른바 금 뚜껑이라 부르는 금도금 된 뚜껑에 새겨진 것입니다. 1/10은 뚜껑 중량의 10분의 1 이란 것이고, 16K,14K,12K는 금의 순도입니다. 즉 1943년산은 16K 금으로 뚜껑 중량의 1/10로 뚜껑을 씌웠다는, 아주 두꺼운 도금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들어가는 금의 중량은 그냥 두고 16K에서 14K 다시 12K로 순도를 내렸던 것입니다. 이 역시 엄청난 양의 금이었습니다. 파커51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만년필의 하나로 1947년에만 210만 개가 넘게 팔렸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가벼운 펜촉과 얇은 금도금의 뚜껑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몰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두 만년필 모두 당대 최고급을 표방하고 나온 터라 처음엔 온갖 정성을 들이고 아낌없이 물량을 투입해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료의 효율적인 투입과 부품간의 밸런스도 알게 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차차 원가 절감도 생각하게 되었겠지요.

현대의 원탑 몽블랑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 몽블랑 149는 어떨까요. 이번에도 펜촉의 무게를 재어 보았습니다. 1970년대 초반, 2000년대 초반, 그리고 요즘의 펜촉입니다. 세 개 모두 18K로 각각의, 무게는 1.21g, 1.18g, 1.07g. 몽블랑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펜촉의 무게가 줄어들었습니다. 몽블랑이 몰라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된 옛날도 아니고, 기술의 나라 독일의 회사인데 원가 절감 외에 우리가 모르는 기술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몽블랑 149 펜촉들   
 
아래 1960년대 후반, 중간 2000년대 초, 
위 2020년 중간과 위의 것을 보시면 펜촉 뿌리에 원가 절감을 위한 코스트 컷(cost cut)이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기술과 효율에 상관없이 모르면 아낌없이 물량을 쏟아 부은 옛날 만년필들이 좋습니다. 마치 단어를 외운 다음 사전을 찢어 드시던 한 세대 위 어른들과 선배들이 존경스러운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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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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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121.XXX.XXX.140)
윌리엄 수사가 워터맨 58을 닮았다는 말씀이 정말 맞는것 같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워터맨 58을 본 적이 있는데 웅장하고 화려한 것이, 이미 계산적이게 되어버린 오늘날의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올곧은 화려함이 느껴졌습니다 :) 오랜만에 장미의 이름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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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0 10:36:04
0 0
박종진 (211.XXX.XXX.243)
저도 요즘 독서에 푹 빠졌는데 지금 읽고 있는 책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입니다. 다 읽고 나면 또 어떤 만년필이 생각날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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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1 08:03:54
0 0
뺙뺙양이나나 (14.XXX.XXX.176)
시간 흐름에 따른 소소한 꼼수가 보이네요 ㅎㅎ
과연 다음 꼼수는 무엇이 될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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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9 18:20:40
0 0
박종진 (175.XXX.XXX.83)
들키지 않도록 꽁꽁 숨겨 놓겠죠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바로 들통 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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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0 07:46:44
0 0
워너비미중년 (164.XXX.XXX.146)
경향이 효율화로만 흘려 인간미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때로는 무용함이 주는 미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을진데.. 지금은 현행 양산품 몇개로 현실과 이상 사이를 타협하지만...라면도 직접 부재료를 아끼지 않고 과하게 넣을 때 가장 만족스러울 때가 있잖아요^^ 언젠가는 저도 재료를 아끼지 않은(?) 과거의 명품들을 사용 해 보고 싶습니다. 직접 살아보지 않았던 시기이지만 만년필을 통해 연결되는 느낌이 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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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9 13:29:47
0 0
박종진 (110.XXX.XXX.179)
늘 원한다면 순수한 열정만으로 만들어댄 만년필을 갖게 되실 거에요^^ 그 만연필도 있는 그런 주인을 갖고 싶어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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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0 07:38:55
0 0
비케이 (182.XXX.XXX.29)
합리와 효율을 넘어서는 낭만, 더 나아가서는 정성이 중요함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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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4 14:49:53
1 0
박종진 (211.XXX.XXX.243)
낭만과 정성 잘 짚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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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5 10:31:25
2 0
남 박 (175.XXX.XXX.18)
'만년필은 구형이 좋다'는 말 속에는 이렇듯 여러가지 의미가 숨어있었군요. 천천히 정독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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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9 07:32:18
1 0
박종진 (175.XXX.XXX.10)
파커45도 처음에 금촉이었습니다.
몸체가 은덩이인 파커75도 초기산이 1/5 정도 무겁습니다.
1987년에 나온 레이트 듀오폴드도 초기산 펜촉이 훨씬 더 좋구요.
구형불패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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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9 10:17:24
0 0
김봉현 (106.XXX.XXX.187)
멋진 물건은 시대를 초월하고 그 가치는 언젠가 인정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기술과 효율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겠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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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2:59:27
0 0
박종진 (175.XXX.XXX.28)
열정이 없을 때 돈, 효율 이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결국 좋아해야 사람이던 물건이던 오래 기억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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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3:13:28
0 0
중년 (223.XXX.XXX.249)
중년이 되면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나오는 장동건처럼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그래도 그렇게 멋있게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만년필은 멋있고 중후한 중년과 노년이 되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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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09:50:09
1 0
박종진 (211.XXX.XXX.243)
노력하고 계시니 분명 멋진 분 이실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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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0:21:26
1 0
mac (182.XXX.XXX.227)
윌리엄 수사가 58이라니... 이제 장미의 이름을 볼 때마다 이 문장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효율을 생각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던 그들의 초심이 참 아름답습니다. 판매고가 그들의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뒤따라와줬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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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09:24:55
1 0
박종진 (211.XXX.XXX.243)
합리와 효율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것을 한 번 즈음 이야기 해보고 싶었습니다. 100년이 지나도 현역이 많은 만년필 세계. 이곳에 꼼수는 통하지 않는 것도 매력의 일부가 아닐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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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0:31:52
1 0
일파 (125.XXX.XXX.125)
멋진 글. 감사. 만년팔 사랑💑 이심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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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09:21:07
1 0
박종진 (211.XXX.XXX.243)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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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0:32:33
0 0
Nerie (175.XXX.XXX.208)
반짝반짝 빛나는 최신형 제품이 꼭 최고일 수는 없다는 걸 만년필을 보며 배우게 되네요. 58을 통해 아낌없이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어 최고의 펜을 만들겠다는 백년 전 사람들의 자신감과 의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수많은 과거의 물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도 만년필은 아직도 저렇게 빛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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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09:12:40
2 0
박종진 (211.XXX.XXX.243)
맞습니다.^^ 명작은 합리와 효율을 넘어서야 나오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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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0:35:34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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