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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꾸기
홍승철 2020년 04월 28일 (화) 00:14:32

2013년에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글(https://news.joins.com/article/10463423)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는 ‘새 악보를 읽고 외우는 것’은 가장 자신 있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사흘에 한 번씩 새 곡을 연주하려면 암보(暗譜)는 힘든 일이라고 토로합니다. 연주회 준비 때 손으로 하는 연습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연주할 곡 듣기를 한답니다. 그래서 무대에서 연주할 때는 손만이 아니라 머리와 귀가 함께 암보를 도와주고 있음을 느낀다는군요. 그 글을 쓸 즈음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1번을 연주할 때는 기억을 돕는 제4의 ‘기관’도 있음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마음’이라구요.

이 글이 생각난 것은 책 한 권 때문입니다. 이미 4년 전에 발간된 『1만 시간의 재발견』을 최근 손에 잡았습니다. 읽는 내내 흥분을 느꼈습니다. 원저의 제목은 『절정(Peak)』입니다.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과 기억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저자 앤더스 에릭슨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천재는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선천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 스킬을 배우는 초기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이점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이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줄어들고, 결국 개인의 실력을 결정하는 데는 노력의 양과 질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아버지가 행한 훈련으로 재능을 개발시킨 결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음악 재능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좋은 훈련법이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말이지요. 그에게 한 것과 같은 훈련으로 재능을 키운 손위 누이의 모범도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에릭슨은 수많은 사례를 들면서 어떻게 재능을 개발하고 훈련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타고난 천재가 많다고 믿어온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으로 갈고닦은 재능이 모두 중요하다고는 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타고난 재능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설득되었습니다. 읽는 내내 떠오른 생각과 기억들 중 손열음의 글 외에 개인적 경험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보면 어린 시절에 음치였습니다. 그 사실과는 관계없이 중학교에 입학하여 맞은 첫 음악 시간에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처음 대하는 노래를 계명으로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다 장조라면 몰라도 샤프(#)나 플랫(b)이 붙은 악보의 계명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입을 크게 벌리고 잘도 부르더군요.
그날 이후로 음악 시간만은 예습을 했습니다. 혼자 입 닫고 있어야 하는 부끄럼을 겪지 않으려고요. 학교 다니는 동안 예습, 복습은커녕 숙제도 잘 하지 않았는데, 음악 시간 전날이면 다음 날 부를 노래를 펼쳐놓고 한 음씩 계명을 적어 넣었습니다. 오선지의 조표(調標)에서 맨 오른쪽 플랫이 붙은 줄이 ‘파’이고 샤프이면 ‘시’라고는 알았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음표 하나마다 “파미레도”, “시도레미” 하는 식으로 계산해서 계명을 적다보니 한밤중이 되곤 했습니다. 그렇게 예습하길 얼마나 했을까. 언젠가부터 계명을 일일이 적지 않고도 처음 보는 노래를 계명창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여러 경로로 음악을 대하였습니다. 피아노 교습을 받은 적도 없지만 고교 때는 보통의 찬송가는 피아노로 칠 수 있을 만큼 노력도 했습니다. 집엔 피아노가 없었으니 교회나 학교의 풍금으로 하루에 한 번씩은 독습(獨習)하였죠. 학생 애창곡 삼백 몇 곡이라는 제목의 악보 책도 구입해서 틈틈이 기타 코드에 맞추어 노래를 불러보았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교회에서 어린이성가대를 맡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엉뚱하고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경영학과 학생이 어린이들에게 호흡법과 모음 발성법을 훈련시켜 한때나마 상당한 수준의 소리를 내게 했지요.
그렇게 지내다보니 주변 사람에게서 음치라거나 노래를 못부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노래를 부르노라면 음감이 좋은 아마추어나 전문 성악가에게서는 음정이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그 문제까지 극복하려고 노력했으면 해내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음악과의 접촉에서 에릭슨이 말하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좋은 교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심적 표상(현재보다 높은 단계의 성취 수준)’을 지닐 만한 상황이 있었기에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에서의 심적 표상은 ‘계명으로 부를 줄 알기’, ‘피아노로 찬송가를 치기’,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훈련하기’ 등일 것입니다.

책을 읽으며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글이 생각난 이유는 에릭슨이 집중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집중의 의미를 정리해 봅니다.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 배분과 관련됩니다. 집중한다는 말은 시간을 많이 배분한다는 뜻입니다. 고교 시절 두 해 동안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대학 입시를 한 해 앞두고 다급해지니 입시와 관련 없는 모든 일을 포기할 정도로 마음을 한데 모은 일이 집중의 예입니다. 이후에야 집중의 의미와 효과를 몸으로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집중의 다른 한 의미는 한 가지에 생각을 모아서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게 만든 상태이지요. 앞의 의미가 시간의 양에 관한 것이라면 뒤의 것은 시간 소비의 질에 관한 것입니다.

손열음이 말한 ‘마음’의 뜻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는 그 뜻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맥락상 집중(또는 의지)이라고 추정합니다. 집중한 결과 음표 한두 개, 혹은 한 악절까지 깜빡 잊을 뻔한 순간에도 손가락이 ‘저절로’ 연주할 수 있겠지요. 머리와 귀의 도움만이 아니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자기 분야의 일에서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서른이 채 되지 않았던 나이에 지혜로운 글을 쓴 피아니스트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나이가 들 만큼 들었는데 웬 재능 개발 이야기냐고 묻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릭슨의 말을 더 인용해야겠습니다. “모든 잠재능력은 개발할 수 있다.” “나이 들어서도 꿈을 가질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신체와 두뇌 모두 성인이 되어서보다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적응력이 뛰어나지만, 대부분의 경우 평생토록 어느 정도의 적응력을 보유한다고 합니다. 나이와 적응력의 관계는 개인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르다고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10여 년 전 라디오 방송에서 유명 발레리나와의 인터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진행자가 발레리나의 초등학교 5학년 때 일화를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엄지발톱이 빠져서 기뻤다고 했더군요. 아프지 않았나요?” “그전에 선배들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어요.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면 발톱이 빠진다고요. 실제로 발톱이 빠졌으니 내가 열심히 하긴 한 모양이라고 생각되어 만족스러웠죠.”

나이 들어서도 어린 발레리나 지망생과 같은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고 꿈을 꾸어 봅니다. 대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감은 갖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그래도 말입니다. 평생 종사해온 분야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이 있다면 뒤늦게라도 하나쯤은 이룰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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