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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톤의 성자(聖者) 피셔 디스카우
김창식 2020년 02월 13일 (목) 00:06:08

겨울도 막바지에 이른 2월 중순이군요. '겨울이 오면 봄인들 멀리 있을라고?'(<서풍의 노래>, 셸리) 이른 봄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도 하련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아 착잡합니다. 중저음의 바리톤 노래로 울적한 마음을 달랩니다.

바리톤 가수들의 면면을 살펴보죠. 토마스 햄슨, 브린 터펠,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가 3대 바리톤입니다. 마티아스 괴르네도 빼놓을 수 없겠죠. 그 윗세대로는 헤르만 프라이가 있었고요. 그렇다 해도 역대 최고의 바리톤은 성자(聖者)로 추앙받는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her-Diskau, 1925~2012)입니다.

피셔 디스카우를 접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 친하게 지내던 같은 과(독문학) 선배의 집에서였습니다. 바깥 만남 끝 아쉬움을 달랠 겸 선배의 집으로 와서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지요. 선배의 집이 을지로 골목길에 있었고, 집 2층에 다락방이나 다름없는 조그만 방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술을 홀짝이며 음악을 들었답니다.

그때 LP판으로 들은 노래가 피셔 디스카우가 부른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Die Winterreise)>였습니다. 피아노 반주는 환상의 ‘케미’를 보여준 제럴드 무어였고요. 사위가 어두운 다락방에서 촛불 한 자루 켜놓고 피셔 디스카우의 절제된 음성으로 듣는 ‘보리수(Der Lindenbaum)’. 그때의 쓸쓸함이 깃든 ‘안온함(Gemuetlichkeit)’이라니! 수십 년 전에 요즘과는 또 다른 의미의 ‘소확행’을 경험한 셈이지요.

슈베르트가 나이 30세 때(1827년) 작곡한 <겨울 나그네>는 총 24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연가곡입니다. 빌헬름 뮐러의 시를 바탕으로 한 가곡 모음이지요. 실연한 청년이 추운 겨울날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들판으로 방랑의 길을 떠납니다. 청년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고독과 절망이 짚이며 백발, 환상, 폭풍, 홍수, 까마귀, 풍향계, 이정표, 도깨비불 같은 죽음에 대한 상념이 마음속에 똬리를 틉니다.

<겨울나그네>는 서정적이면서도 밝고 아름다운 전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에 비해 음울하고 어두운 정조가 가득한 작품입니다. 슈베르트가 이 곡을 시연하였을 때 친구들은 제4곡 <보리수>가 그나마 낫지만, 그 밖의 다른 곡들은 너무 어둡지 않으냐며 걱정했다고 합니다. 슈베르트는 그렇지 않다고, 머지않아 사람들이 전 곡을 다 좋아하게 될 거라고 대답했죠. 과연 그러했습니다. 슈베르트가 다음 해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후 <겨울나그네>는 후세에 만화방창(萬化方暢)한 봄을 맞거든요.

피셔 디스카우는 <돈 카를로스>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오페라에도 출연했지만, 역시 독일 예술가곡(Lied)에서 그 출중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피셔 디스카우의 장점은 절제된 음색과 언어 감각의 정통성에 있습니다. 독일어 단어 하나하나를 묵음까지 포함해 정확하게 발음합니다. 한때 피셔 디스카우를 사사했던 마티아스 괴르네의 부드러운 목 넘김 노래와 비교해 들으면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피셔 디스카우는 ‘독일어의 아름다움’을 일깨웁니다. 나나 무스쿠리의 독일어 버전 노래가 그러했듯.

피셔 디스카우가 부른 <겨울나그네>는 24곡 모두가 절창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곡들을 열거해봅니다. 밤인사(1곡), 풍향계(2곡), 얼어붙은 눈물(3곡), 보리수(5곡), 홍수(6곡), 도깨비불(9곡), 봄꿈(11곡), 우편마차(13곡), 까마귀(15곡), 폭풍의 아침(18곡), 환상(19곡), 이정표(20곡), 거리의 악사(24곡) 등. 마침 <겨울나그네>의 종곡(終曲)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가 흘러나오는군요.

‘마을 저쪽 뒤편에 풍금 켜는 사람이 서 있네)~/얼음 위를 맨발로 비틀거리며 찾아다니지만~/작은 접시는 빈 채로 있네~/누구 하나 들으려 하지 않고~/어느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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