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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품격과 막말, 그리고 고자질
이성낙 2020년 02월 05일 (수) 00:12:41

국내에 거주하며 우리 사회를 지켜보는 다양한 지구촌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에 경탄하며 입을 모아 찬양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 사회의 활발한 역동성과 거침없는 진취성이라고 합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에 붙은 대명사처럼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이룩한 오늘날의 모습을 지켜본 국내외 석학들의 평가도 들려옵니다. 《총, 균, 쇠》(2005)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신작 《대변동-위기, 선택, 변화》(2019)에서, 오래전 많은 경제학자들이 한국은 자연자원이 풍부한 아시아의 필리핀이나 아프리카의 가나보다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그러한 예측을 뛰어넘어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만약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의 예측대로 우리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아찔해지기까지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만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국가로 성장해 사회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가끔 비문명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증상이 터져 나와 속절없는 ‘가슴앓이’를 하곤 합니다.

그 한 사례가 바로 얼마 전 국내 한 대학 병원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병원 행정 책임자가 동료 교수에게 퍼부었다는 ‘막말’과, 같은 대학 병원 소속 교수의 ‘고자질’ 행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건을 지켜보는 의료계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고, 서글프고, 부끄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의료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 내재된 치부(恥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한 기관의 최고의 책임자 또는 직제상 윗사람이 동료 교수에게 ‘막말’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어떤 변명으로도 공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한 기관의 조직 체계에서, 아랫사람이 상사와의 대화를 녹취했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도 수년 전의 만남에서 녹음한 것을 외부 언론에 흘렸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필자는 특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고발(告發)과 고자질’의 혼재·혼용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염려스럽게 지켜봐온 터라 더욱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고자질과 관련해 오래전 겪은 에피소드도 생각납니다. 유학생으로서 오직 학업에만 몰두하던 필자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 현상에 차츰 눈을 돌리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더욱 기억에 생생합니다. 1960년대 초반에 독일은 TV가 폭넓게 보급되면서, 전국 어디서나 동일한 뉴스와 동일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회로 변모했습니다. 이처럼 TV 매체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시청자가 피동적으로만 ‘수신’하던 시점에 모든 시청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출현했습니다.

한 프로그램 기획자가 미궁(迷宮)에 깊숙이 빠져 잊힌 대형 사기(詐欺) 사건이나 살인 같은 사건을 TV 영상에 과감히 올렸습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제보가 몰려들었고, 방송사에 임시 마련된 ‘수사본부’에서는 전담 형사들이 축적된 정보를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지 경찰팀을 지휘해 범인을 체포하는 현장까지 생생한 영상으로 전달했습니다.

긴박감 넘치는 탐정극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거물급 살인 혐의자나 대형 사기꾼을 체포하는 장면을 TV에서 현장 중계로 보노라면 절로 통쾌했습니다. 시청자들은 환호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주었습니다. 마치 월드컵 경기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프로그램이 TV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유인즉 당시 사회비평가들이 그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온 시청자를 고발자(告發者)가 아닌 밀고자, 고자질쟁이로 몰고 갈 것인가? 모든 시청자를 형사로 양성할 것인가?”라고 그 프로그램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때 필자는 ‘고자질쟁이’, ‘정탐꾼’, ‘배신자’(Verraeter, Petzer)라는 단어가 갖는 사회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고발정신은 민주 사회의 핵심 요소이며 한 사회의 성숙도와 축을 같이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민주 사회에서는 고발 행위를 ‘시민의 용기(Zivilcourage)’로 높이 평가하는 정서가 있다는 것도 차츰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발에는 올바른 용기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오늘날의 우리 사회로 돌아와서, 만약 의료원 책임자와 대화를 하면서 해당 교수가 공개적으로 “우리의 대화를 녹취하겠습니다.”라고 분명히 밝혔다면, 아마도 무거운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녹취 사실을 당사자에게 알리지 않고 외부에 공개한 것은 분명 ‘고발’이라기보다는 ‘고자질’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경구가 떠오릅니다.

이번 ‘막말과 고자질’ 사건이 비단 우리 의료계만의 모습은 아니기에 필자는 더욱더 마음이 무겁습니다. ‘막말과 고자질’이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결코 품위나 품격 같은 단어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해야 우리는 좀 더 밝고 품위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의 품격에 더해 행위의 품격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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