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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의 현실
안진의 2018년 12월 21일 (금) 00:03:37

미술대학 순수미술전공 학생들이 졸업을 하면 당장 어떤 진로를 가질까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의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그저 미술이 좋아서 또는 미술을 잘해서 막연히 화가를 꿈꾸고 미대에 입학했던 동기들이 많았습니다. 재수는 기본이었고 삼수 오수 칠수까지 다양했고 화가가 당장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님을 마치 숙명인 양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졸업 즈음엔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작업실을 구하는 데 애를 썼습니다. 경제적 부담을 덜어보고자 여럿이서 공동 작업실을 쓰는 일이 많았는데, 임대료에 재료비까지 많은 돈이 필요하여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습니다. 그중 미술학원에서 대학 입시 미술을 지도하는 것은 수입이 괜찮은 편이었는데, 실력 좋은 몇몇만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미술학원을 운영하기도 했고, 유학을 떠나는 친구들도 있었고,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학교나 미술관 디자인 관련 회사에 취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는 동기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생계비만 벌 수 있다면 나머지는 작품 제작에 몰두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슴에 품었던 것 같습니다. 돈을 벌어 대학원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에 오는 졸업 동기들도 꽤 많았으니까요.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은 요즘 미술대 학생들의 졸업 후 진로를 바라봅니다. 대학원, 유학,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업에 몰두하는 등 별반 차이는 없습니다. 교직이나 미술학원 강사는 드물게 있는데, 교직 진출이 어려워진 것은 교원 임용 고시의 경쟁률이 높아졌기 때문이고, 학원 강사 자리 또한 미술대학들의 비실기 전형이 확대되면서 일자리가 많이 줄어든 상황 때문입니다.

예전보다는 창작 스튜디오를 제공받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나 전시 지원 공모가 조금은 생겨서, 작업을 이어가려는 학생들이 있지만 기회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자연스레 취업쪽으로 더 많은 관심을 갖는 편인데 그렇다고 미술에 대한 마음을 접은 것은 아닙니다. 당장은 생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고, 향후 그림은 계속 그리고 싶다는 마음들이 간절합니다. 

이러한 졸업 후의 생계 걱정은 사실 대학 입학 후부터 바로 시작됩니다. 면접에서 반짝이는 눈빛으로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고 의욕에 가득 차서 진학 후의 학업 계획들을 말했지만, 막상 1년도 지나지 않아 졸업 이후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실용미술이나 문화예술경영 등을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으로 하며 취업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대학의 교과목에 응용실기과목이 늘어나고 융합과정이 생겨나는 것은 단순히 미래사회에 대한 학문적 예견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취업을 위한 준비과정의 반영인 셈입니다. 전공이 하나인 것만으로는 자신감도 부족하고 결핍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선택하고 결국 졸업이 늦춰지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졸업 작품 전시를 준비하면서 학생들의 실력은 폭풍 성장을 하게 되는데, 4년의 재학 기간 중 가장 열렬히 작업을 하는 시기이고 이 시기에 그림을 지속해서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만 차가운 현실 앞에서 좋아하는 그림은 나중에 그리고 지금은 취업을 선택해야할 것 같다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동자들을 마주합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졸업을 하지 않고 졸업 유예를 하는 현상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졸업 유예 기간은 한 학기 정도가 아니라 1년 혹은 취업할 때까지 하겠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졸업하지 않고 학적을 유지하며 인턴쉽 등 학생 신분으로서 지원 가능한 일들을 도모하며, 학자금 대출에 따른 빚 청산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취업 전까지의 공백기를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인데, 경기 침체와 취업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졸업예정자들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대면하며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선생님은 어떻게 작가로서 살아올 수 있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해준 답은 “버티기”였습니다. 화가를 직업으로 삼기에는 냉혹한 현실이다 보니 결국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극단적 상황에서 살아남는 생존법이었으니 씁쓸한 방법론입니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열정'입니다. 특히 여성작가로서 출산 육아에 이르는 동안 아무래도 작업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림은 화지에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모든 창과 프레임이 화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라보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작업을 하는 시선이고 마음이고 표현이라는 자기 암시를 하면서 말입니다. 

몸만 분주한 것을 ‘열심’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바쁠 뿐이지요.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로 내 마음이 뜨거울 때 ‘열심’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한심’이라면 마음이 차가운 것이고 곧 열정이 없는 상태이겠지요. 마음을 뜨겁게, 열정을 가지고 잘 버텨 가길 바랍니다.  해마다 졸업생은 나올 것이고, 졸업유예가 유행이 될 만큼 취업난에 각박한 삶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내가 진정으로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가슴에 품고 열정을 다한다면 미소 짓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려면 예술가이자 동시에 생활인으로서 삶을 버텨 가는 꽤 긴 공백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시기에 졸업예정자 즉 작가 지망생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사회적 관심과 지원도 절실합니다. 예술이 당장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귀한 가치를 품기에 함께 동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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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21:4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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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권 (106.XXX.XXX.146)
안 교수님의 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애정이 묻어나는, 참으로 따뜻한 글이네요.
'열심'과 '한심'에 대한 문구도 인상적이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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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1 10:5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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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찬국 (220.XXX.XXX.87)
어려운 환경에서 창작의 열정을 품고있는 작가지망생들의 ‘버티기’를 응원합니다. 그들도 언젠가 교수님처럼 고운 꽃으로 가득찬 백열등 전구를 찾아 그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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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1 08: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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