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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에서 만난 동창
한만수 2018년 12월 11일 (화) 00:09:43

얼마 전에 ‘세상이 참 좁다.’는 말이 생각나게 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매주 월요일 서울에 올라와서 생활을 하다 금요일 내려가는 탓에 항상 기차표는 예약해 두는 편입니다.
자주 이용하는 기차는 오후 1시여서 금요일이라도 좌석 여유가 있습니다. 그날도 옆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습니다.

수원역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옆자리에 천천히 앉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습니다. 놀랍게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 정식이가 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저도 고향에서 살다보니 분기마다 정기모임 있을 때, 혹은 읍내 마트 같은 데서 얼굴을 한 번씩 봅니다. 그런데도 기차 안에서 만나니까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정식이는 수원에 사는 친척을 병문안하고 내려가는 중이라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매일 먹는 밥과 밖에서 돈을 주고 사 먹는 밥은 맛이 다릅니다. 기차에서 만나니까 동창이 더 정겹게 보이고, 더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모임 때는 그저 안부 인사나 주고받거나, 포도농사 작황을 물어 보는 정도였지만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다닐 때 추억으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정식이는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수업을 받지 못하고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되돌려 보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의 이름이며, 같이 쫓겨났던 동창들의 이름들이며, 그들이 살던 동네까지 소상하게 추억 밖으로 끄집어냈습니다.

저는 정식이 말에 대꾸를 안 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담임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몇 대씩 두들겨 맞고 교실 문을 나섰던 급우들만 기분이 참담했던 것은 아닙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픈 손바닥을 호호 불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도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제가 마치 그들을 쫓아내는데 한 몫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숙이고는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학교 측백나무 울타리를 따라서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떼를 지어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입니다.

정식이는 학교에서 쫓겨나면 집으로 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떼를 써 봤자 아침에 없던 돈이 나올 리 없고, 부모님한테 떼를 써 봤자 돌아오는 건 아버지에게 지겟작대기로 얻어맞거나, 어머니에게 바가지로 얻어맞는 일만 기다리고 있었을 거랍니다. 집으로 가는 대신 동네 사람들이 잘 오르지 않는 산골짜기, 혹은 줄기가 큰 담배 밭에 숨어서 하교(下校)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정식이는 기성회비며 잡부금을 제때 못 내는 것이 미안해서 몸으로 때우는 일은 언제든 앞장섰다며 마르게 웃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잡부금 이외도 11월이면 학교 난로에 땔 장작을 몇 개씩 가져갔고, 여름에는 학교 사육장에서 키우는 토끼먹이로 아까시 잎을 훑어가기도 하고, 어느 해 가을에는 잔디 씨앗을 한 홉씩 훑어서 학교에 갖고 가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해는 아주까리 열매를 따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정식이는 장작이며, 아까시 잎이나 아주까리 열매 같은 것은 제일 먼저 내는 것도 부족해서 다른 급우들보다 두 배 이상을 갖고 갔다고 말했습니다. 장작을 갖고 갈 때는 새끼로 묶은 장작단의 무게에 어깨가 아플 정도로 들고 가서 냈다고 하얗게 웃었습니다.

요즘에는 기차에서 식당 칸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과자며 음료를 자동판매기로 판매를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식당 칸에서 맥주라도 마시며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겠지만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대화를 했습니다.

정식이는 그때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담임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맞고 집으로 간 급우들 일곱 명 중에 혼자만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동창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철공소로, 상점의 점원으로, 양복점의 시다로 취직이 되어 객지로 나갔답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지게를 지고 밭으로 갈 때마다 그 동창들이 그렇게 부러웠었다고 술회(述懷)했습니다. 서른 몇 살부터 포도농사를 짓기 시작하고부터 객지로 떠난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이 사라지고 일찍부터 농사를 짓게 한 아버님에 대한 고마움이 자라기 시작했답니다.

담배나 심고, 메밀을 심던 비탈밭에 포도나무를 심으니까 연 소득이 적게 나올 때가 5천만~6천만 원, 최고 기록은 2천5백 평의 포도밭에서 1억 원 이상을 벌었을 때라고 자랑했습니다. 지금도 월급으로 치면 월 5백만 원 이상 버는 셈이니까 먹고사는 걱정은 안 한다고 말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자식 걱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정식이는 자식만큼은 반드시 대학을 보내고 싶어서 아들을 중학교 입학시키고 곧바로 영어며 수학학원에 보냈답니다. 소원했던 대로 아들 형제는 모두 대학을 졸업했답니다,

문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이 되면 결혼을 시킬 계획을 했는데 지금도 장남이 백수로 지내고 있다는 겁니다. 대전에 사는 작은애는 그나마 컴퓨터 수리가게에 취직을 해서 제 밥벌이를 하는데, 서울에 사는 장남은 벌이가 없어서 생활비로 매달 백만 원씩 송금을 해주고 있답니다.

“집에 내려와서 포도농사를 지으라고 하지, 뭐 하러 생활비를 보내주냐?”
“야!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대학 나왔잖아. 대학 나온 놈이 포도농사나 짓고 있으면 되겠냐? 서울에서 대학 시키느라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아냐? 그럼 당연히 흙 안 묻히는 일을 해야지.”
“요즘 대학 졸업자는, 옛날에 초등학교 나온 거 하고 비슷해. 우리 클 때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면서기는 해 먹었잖아. 면서기면 9급 공무원이라고. 면사무소에 가 봐. 죄다 대학교 나온 애들이야.”
“취직도 취직이지만 장가를 보내야 하잖아. 요새 농촌에서 농사짓는 놈한테 어떤 여자가 시집오냐?”
“대학 나왔겠다. 일년에 오육천 만원 벌겠다, 포도농사라는 것이 일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하는 것도 아니고, 봄에 전지나 해주고 여름에 따서 팔면 가을부터 바다낚시로 세월 보내는 농사 아니냐?”
“그걸 누가 몰라? 시집올 당사자들이 모른다는데.”

정식의 말에 저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요즈음 농촌에서도 저만 부지런하면 도시 샐러리맨들 못지않은 수입을 올립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직장 그만두고 내려와서 농사 지으며 노총각으로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도시 사는 젊은 여자들이 농촌 속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직도 농촌은 1960년~70십년 대처럼 못 먹고, 못 사는 지역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는 것이 원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정부에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을 한다든지 무슨 대책을 세워주는 것도 아닌데, 농촌 장날 장 보러 나오는 여자들이 죄다 외국에서 시집온 여자들이라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보도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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