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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준 선물, 유머와 독서
안진의 2018년 08월 24일 (금) 00:31:55

지칠 줄 모르던 더위가 순해졌습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저는 혹한(酷寒)은 수없이 느꼈지만, 혹서(酷暑)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는데, 올여름은 정말 못됐다 싶을 만큼 혹독한 더위였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지인들의 인사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더위에 어떻게 지내는지, 피서는 다녀왔는지. 더위가 재난이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지구촌 이상기온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화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종강을 할 때만 해도 선풍기 바람에 그림도 말리고 몸도 말리며 작업하라고, 여름방학은 가장 많은 작품을 그려낼 수 있는 적기라고 학생들을 독려했었습니다. 하지만 올여름 불볕더위는 선풍기 바람만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제 작업실의 오래된 에어컨도 기진맥진 제 역할을 못해주었고, 집 근처 가파른 오르막길 작업실에 올라오면 온몸이 땀에 젖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대학 동기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나 혼자 웃었습니다.  참고로 이 친구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입니다. 친구의 작업실은 2층에 있는데, 어느 날 잠깐 현관 밖으로 나왔다가 실수로 문이 닫혀버렸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날씨가 너무 더워서, 홀라당 옷을 벗고 작업용 앞치마만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 친구는 한참을 난감해하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는, 몸을 벽에 바짝 붙여가며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창문을 통해 들어가게 되지요.

한적한 주택가라 그래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붓을 들고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이번엔 현관 초인종이 울리더랍니다. 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수상한 자를 목격했다는 신고가 있어 파출소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집안 수색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경찰을 제지하지 못하고, 본인은 최대한 알몸 뒤태가 보이지 않도록 뒷걸음을 쳐서 벽에 기댄 후, 적당히 진술하고 돌려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친구가 이야기를 마치자 “아무리 덥다 해도 그렇지 왜 다 벗고 앞치마만 하고 작업하느냐”부터, “그럼 아예 다 벗고 그림을 그리지. 그랬으면 알몸으로 나올 일은 없잖아”까지, 주변의 웃음 섞인 질타와 타박이 거세졌고 저는 오랜만에 한바탕 깔깔 웃었습니다. 올여름 스트레스를 떨치는 방법 중에 새로이 각성하게 된 것이 있다면 유머였습니다. 입담 좋은 친구의 아찔한 경험이 한낮의 푹푹 찌는 더위에도 저를 웃게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소설 읽기도 스트레스 해소법의 재발견이었습니다. 종강하고 나서 그간 쌓인 과로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작업 때문에 예민해져서인지, 참기 어려울 만큼 극심한 두통으로 병원과 한의원을 오갔습니다. 처음엔 바늘로 찌르는 듯 심한 통증 탓에, 도마 위의 생선처럼 팔딱팔딱 몸을 떨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게 의사는 침을 놓아주면서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다고,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으면 좋겠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맡은 역할이 많고 그만큼 할 일도 많고 저의 뇌도 복잡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한데 뇌가 피곤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렇다고 가만있는 성격은 못 되니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으면 어떨까 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픽션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 전문서적이나 에세이를 주로 읽었는데, 불현듯 잡념을 버리고 몰입할 수 있는 재밌는 소설책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된 첫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였습니다. 주인공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라 감정이입이 잘되었고 인물의 섬세한 묘사력에 감탄하였으며, 소설 전반에 흐르는 묘연함은 제 작업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내친김에 그의 또 다른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습니다. <상실의 시대>로 번역되었다가 다시 원제를 갖게 된 책으로, 순수와 도발과 허무로 교차되는 사랑 이야기가 아름다운 색감의 표지에 안겨 있었습니다. 빨강과 초록의 그라데이션 배색이었는데, 너무 예뻐서 책을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다음엔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읽었습니다. 정신과 의사 ‘이라부’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따라가다 보면, 환자들이 저절로 훌륭한 처방을 받게 되는데, 웃음이 가득 퍼지는 유쾌한 책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단편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어느덧 하나로 연결되는 구성이 매력적입니다. 특히 3인조 좀도둑의 인생이 얼마나 값진 인생으로 빛날 수 있는지 그 기회를 내주고, 선의에 대한 믿음은 기적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웃음과 함께 감동적으로 그려냅니다.

오늘은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를 통해, 책을 너무나 사랑하는 스물다섯의 여주인공 '콩스탕스'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는 도중에 낙서와 밑줄을 발견하게 되고, 기묘하게도 밑줄로 표시된 글들에 공감하며, 책을 통한 대화로 사랑에 빠지는 내용입니다. 도스토옙스키, 키르케고르 등 실제 유명 소설의 문장들도 다시금 음미하게 되고, 새록새록 가슴에 새겨지는 아름다운 언어의 향연도 맛볼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올여름 두통은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재밌고 유익한 책들은 제게 스트레스로 이어질 생각을 멈추게 하고 휴식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예쁜 색감의 북 디자인이면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유머와 독서는 여름이 제게 준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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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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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남 (14.XXX.XXX.17)
<시원하고 맑은 글> 속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웃음의 묘약까지 곁들였군요.
혹서의 여름을 보내는 멋진 송사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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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09: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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