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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白石)에 기댄 짧은 생각
박상도 2018년 04월 09일 (월) 00:05:48

얼마 전 성북동 자락을 내려오다가 길상사(吉祥寺)에서 발길을 멈췄습니다. 원래는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었던 곳인데 그 주인이 그곳을 통째로 시주를 해서 사찰이 된 곳입니다. 시인 백석의 여인 ‘자야(子夜)’가 바로 대원각의 주인이었는데,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나오는 나타샤가 바로 그녀입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필자가 학창시절에는 접할 수 없었던 시입니다. 그 이유는 백석이 북한에 살고 있는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1988년 월북 시인의 시가 해금(解禁) 조치되기 전에는백석의 시를 읽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백석은 월북도 납북도 아니라 그냥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이라 그곳에 살았을 뿐인데, 과거 우리나라를 집어 삼켰던 이데올로기가 그의 시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샆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섧게 울은 슬픈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을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의 <여승(女僧)>을 접한 건 필자 나이가 40이 넘어서였습니다. ‘아! 나는 왜 이 시를 지금 보게 되었는가?’ 시를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시에 대한 감탄이 아닌 늦은 만남에 대한 탄식이었습니다. 친일을 했던 사람들의 작품을 무수히 많이 배웠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 이상한 시도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소중한 학창시절에 나는 백석이라는 존재를 몰랐던 것입니다.

해방 이후, 백석은 북에, 사랑하던 여인은 남쪽에 살게 되며 생이별을 했고, 백석은 예술을 선전선동의 도구 이상의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정책으로 인해 결국 펜을 꺾고 필부의 삶을 살다가 촌로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백석을 남쪽에 살았던 자야는 잊지 못하고 1,000억 원에 달하는 자신의 전 재산을 시주하며, “내 재산 모두가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시인으로서 백석을 평가한 말임과 동시에 연인으로서 백석을 향한 못다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이 말 한마디에 담겨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길상사를 지날 때마다 필자는 가슴아픈 우리의 근현대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 13년 만에 남측 공연단이 북에서 공연을 하고 이 모습을 김정은 위원장이 관람했다고 합니다. 남측의 공연은 본질상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13년 전보다는 북쪽 관객들이 이번 공연을 편하게 즐겼다고 하니 이제 북쪽도 예술을 그 자체로 즐기기 시작한 것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진작에 그랬다면 ‘백석 같은 위대한 시인이 촌부로 삶을 마감하진 않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긴 예술인을 체제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북한이나 월북 예술가의 작품 감상을 금지했었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관리한 남한이나 도긴개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보면 지금은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옛날에는 ‘반공’ 도는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등교하는 학생의 책가방을 뒤져서 사회학 서적에 마르크스 분량이 조금 나온 것을 보고 잡아가던 시절에 필자는 대학을 다녔습니다. 더 오래전에는 인혁당 사건이 있었습니다. 국가권력이 그러한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근거는 그 시대를 지배했던 반공 이데올로기가 사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정치세력과 상승효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제주도 4·3 사건에 대통령이 사과하는 날이 왔습니다. 그런데 야당은 4·3 사건에 대해 현 정부와 다른 인식을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 국민이 선택한 답이 무엇인지는 대통령의 지지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좌파정권’이라는 이념적 색깔을 입히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계추의 움직임처럼 역사는 진자운동(振子運動)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과거 과도하게 오른쪽으로 움직인 역사의 시계추가 이제는 그 반대쪽으로 기울어지며 합을 맞춰나가는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 과정이 좀더 세련되기를 바랍니다. 6·25 때 북한군에 의해 희생당한 가족이 있는 사람들, 북한에 전 재산을 두고 월남한 사람들, 지금은 의미가 퇴색했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 천안함 피격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 무장공비에 희생된 가족을 둔 사람들에게는 ‘좌파’나 ‘빨갱이’라는 말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아픔일 것입니다.

과거 국가권력의 과도한 남용으로 인한 잘못을 지금 정부가 ‘사과’하는 것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볼 때,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를 하는 거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념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희생의 경우, 이쪽을 어루만지면 저쪽은 섭섭해지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먼저다>,문재인 대통령이 쓴 책의 제목입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국가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념이 먼저였던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필자는 백석의 시를 감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념보다 사람이 먼저였다면 백석과 자야가 가슴 아픈 이별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필자는 백석의 시를 훨씬 일찍 읽었을 것입니다. 이념보다 사람이 먼저였다면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극복과정이 이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념보다 사람이 먼저라면 북한과 대화에 나설 때, 북한과의 대립으로 희생된 분들의 가족에 대한 적절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분들의 희생은 조국을 위한 것이고 그분들이 사랑한 조국을 위해 지금 대립했던 북한과 대화를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아픔을 잉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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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노 (175.XXX.XXX.199)
길상사, 저도 가보았지요
기억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건
법정 스님의 "네덕 내탓"이란 문구였습니다. 굉장히 짧은 문구였는데, 그게 가장 좋았어요.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이 "잘되면 내탓, 못되면 조상탓"을 합니까. 하루에도 수없이 자기합리화를 일삼는 사람을 보게됩니다. 정말 지겨워요.

만약에 우리가 살면서 "모든 건 당신 덕분입니다 "라고 말할수 있다면 이세상에 평화가 찾아올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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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4 10:01:21
0 0
초록 (125.XXX.XXX.188)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신분의 차이를 극복 못한 세기의 가장 가슴 아픈 열정적 사랑이었죠.

이 땅에 더 이상은 이념의 간극 때문 눈물 흘리는 애통한 사람들이 없기를.......

또한 이념 탈출을 통해 남북 관계가 잘 다듬어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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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08:42:38
0 0
김윤숭 (183.XXX.XXX.238)
도긴개긴이라는 말은 심합니다.
수령만 찬양하는 문학국가와 정부욕하면 베스트셀러되어 부자되는 작가의 나라가 같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강연1시간동안 이명박당시재임대통령 욕을 수백번한 작가가 그날 소설이 천만권 팔린 날이라고 스스로 자랑한 것입니다. 어디가 도기개긴인가요. 블랙리스트라고 돈못벌고 그러지 않고 오히려 더법니다. 왜 같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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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12:13:39
2 2
수탉 (222.XXX.XXX.194)
자야의 식견이 놀랍습니다.
시 한줄의 평가가 그렇지요.
답변달기
2018-04-09 09:58:00
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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