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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나?”
방석순 2018년 02월 05일 (월) 00:01:37

“보고 있나?”

스물한 살 청년 정현이 그렇게 물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돌이었던 노박 조코비치(30, 세르비아)를 3-0으로 물리친 직후였습니다. 팬들에게 사인해 주던 그가 돌연 중계 카메라 렌즈에 그렇게 썼을 때 ‘저게 뭐지?’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소속했던 팀 해체로 상심이 큰 옛 감독에게 보내는 위로의 인사였답니다.

그래도 제겐 그렇게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오늘도 아웅다웅 편 가르고 싸우는 이 나라 어른들을 힐책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눈 좀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라!” 하고. 세계무대를 목표로 당당히 도전하고 땀 흘리는 젊은이에게 우리는 얼마나 비루하고 부끄러운 존재로 비칠까, 하는 자책이 들었습니다.

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21, 한국체대)이 2018년 새해 벽두 호주 오픈에서 4강에 올랐습니다. 난시라는 개인적인 핸디캡, 풍족하지 못한 우리 테니스계의 여건을 극복하고. 기적 같은 일입니다. 마치 박세리가 US오픈 골프의 맨발 투혼으로 외환 위기에 위축된 우리를 위로해 주었듯이 정현은 호주 오픈 돌풍으로 갈등과 분열에 지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호주 오픈은 프랑스 오픈, 윔블든, US 오픈과 함께 세계 4대 메이저 테니스대회입니다. 4개 타이틀을 모두 차지하면 그랜드슬램이라고 합니다. 그랜드슬램은 물론 그중 단 하나의 대회에서 우승하기만 해도 개인의 큰 영광일 뿐 아니라 그 나라 테니스의 자랑으로 여깁니다.

2018년 시즌을 여는 호주 오픈에서 보여준 세계 랭킹 58위 정현의 발전은 그야말로 괄목할 만했습니다. 1라운드에서 35위 미샤 즈베레프(30, 독일)에 기권승, 2라운드에서 53위 다닐 메드베데프(21, 러시아)에 3-0으로 완승했습니다. 3라운드에서는 4위 알렉산더 즈베레프(20, 독일)와 접전 끝에 3-2로 역전승했습니다. 상대는 한결같이 장신에 파워 서브를 자랑하는 상위 랭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24일 16강전에서 한때 세계 1위로 군림했던 조코비치(14위)를 3-0으로 꺾어 한국 테니스 사상 처음 메이저대회 4강의 발판을 닦았습니다. 8강전에서 3-0으로 제압한 테니스 샌드그렌(26, 97위, 미국)은 경력이나 경기력에서 정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조코비치는 오랫동안 정현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2011년과 2015년 두 차례나 호주․US 오픈과 윔블던, 3개 메이저대회를 휩쓸었고, 2016년에도 호주․프랑스 오픈을 제패하며 세계 랭킹 1위로 군림했었습니다. 호주 오픈에서는 2008년 처음 정상에 오른 이후 여섯 차례, 메이저대회 통산 12회 우승 기록을 남겼습니다. 최근 다소 슬럼프에 있지만 ‘세계 남자 테니스 빅4’로 엄존하는 전설 조코비치를 넘어선 정현의 기쁨을 알 만합니다.

4강전에서 맞선 로저 페더러(36, 2위, 스위스)는 제2 전성기를 구가하며 처음 그랜드슬램 20회 우승을 기록한 테니스 사상 최고의 선수입니다. 코트 위에서 춤추는 듯, 우아한 그의 플레이는 ‘황제’라는 칭호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정현이 첫 세트를 빼앗긴 가운데 발바닥 부상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지만, 페더러와의 맞대결은 장차 성장의 자양분이 되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입니다. 페더러는 세계 1위 라파엘 나달(31, 스페인)을 물리치고 올라온 마린 칠리치(29, 6위, 크로아티아)를 결승에서 3-2로 누르고 호주 오픈에서만 여섯 번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호주 오픈에서의 선전으로 정현은 세계 랭킹 29위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 테니스를 대표하는 스타라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세계무대에 이제 겨우 이정표를 세웠을 뿐입니다. 메이저 타이틀은 아득히 멀어 보입니다. 좀 더 강력하고 예리하게 서브를 다듬어야 합니다. 상대 공격에 대한 예측과 대비를 강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노력과 열정이 이어진다면 그의 꿈과 영광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정현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부모와 코치진, 지원팀이 정성으로 키워낸 꿈나무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그와 같은 정성이 모여 김연아도 키워내고, 박태환도 키워냈을 것입니다.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 넙죽 엎드려 올린 정현의 절은 바로 그러한 정성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제 곧 평창 동계 올림픽이 시작됩니다. 평화 올림픽, 화합의 올림픽을 만들자는 홍보 메시지가 넘쳐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편으로는 냉소의 기류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사회 분위기가 왜 이렇게 찢기고 갈리고 나뉘는지, 정말 이대로 가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동계 스포츠에서도 어려운 여건 속에 피땀 어린 훈련으로 이번 올림픽을 준비해온 선수들이 많습니다.  지성을 다해 가르치고 지원해온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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