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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금융서비스의 나라 스위스
허찬국 2018년 01월 19일 (금) 00:02:02

1960년대 말 향토예비군이 창설될 무렵 대한뉴스는 목가적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가 강한 이웃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예비군이 있어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무력통일을 위협하는 나라와 대치한 상황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텐데 구차한 억지였지요. 아마 예비군보다는 전주(錢主)나 돈의 성격에 대해 철저히 비밀을 보장하는 스위스의 은행산업이 더 기여했는지 모릅니다.

스위스는 나폴레옹 시절 프랑스에 점령당했던 이후 계속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815년 비엔나 의회는 당시 강국 오스트로-헝가리 제국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스위스의 중립을 인정하였고, 20세기 초 국제연맹은 스위스의 중립을 다시 인정합니다. 예비군 역할론은 아마 2차 세계대전 초기 스위스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한 설명인 듯한데 당시 여러 면에서 협조적인 스위스를 나치가 침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스위스는 언어와 종교가 다양한 주민으로 구성된 캔턴(州)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입니다. 캔턴들은 각각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은밀한 금융거래처 역할을 했고, 유럽 정국이 불안해질수록 자금은 계속 더 유입됐습니다. 불어권인 제네바의 은행들은 18세기 초부터 고객의 정보를 비밀로 하는 규율을 제정하여 지켰는데 이는 큰손 고객인 가톨릭국가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이 스위스의 이단 신교도 은행들과 거래하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국제적 자본흐름이 활발해진 동시에 혁명과 전쟁이 빈번해진 20세기에 들어 잠재적 고객이 늘자 스위스는 1934년 강력한 은행 고객정보보호법을 만들어 정보 누설을 중한 범죄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위스 철옹성 같던 익명성 장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두 인물이 관련돼 있습니다.  

먼저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 에스텔 사피르의 얘기입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스위스 은행들은 나치정권의 인종청소, 홀로코스트(Holocaust)로 죽임을 당한 유태계 유럽인들이 맡겨놓았던 재산, 그리고 보관 중인 나치정권의 재산 처리 문제를 안게 됩니다. 후자의 경우는 정부 간 사안으로 연합국 정부가 개입하여 신속히 정리되었습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의 경우 당사자들이 사망하여 없고, 증빙서류가 있을 턱이 없으니 은행의 협조가 없이는 예금회복이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폴란드 사업가였던 사피르의 부친은 강제수용소에서 갈라지기 전 딸에게 꼭 살아남을 것을 당부하며 자신의 재산을 예치해 둔 은행들의 이름을 딸에게 외우도록 했다. 살아남은 사피르는 외워두었던 프랑스와 영국의 은행들을 방문해 아버지의 재산을 문제없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6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크레딧 스위스은행을 찾아 아버지의 예금을 인출하려고하자 은행은 사망증명서와 예금증서를 요구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처지에 놓인 피해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대응이 1990년대까지 계속되자 많은 피해자 가족들이 전후 이주해 터전으로 삼은 미국의 의회가 개입했고, 비슷한 처지의 홀로코스트 피해자 가족들이 스위스 은행들에 대해 집단소송을 제기합니다. 그 결과 1999년 피고측은 12.5억 달러를 배상하게 됩니다. 국제 여론이 나빠졌지만 2차 대전 때 일들은 시간이 지나며 희석되었습니다.

대부분 선진국들에서 정부지출이 늘어 세수의 필요성이 커지자 세금 탈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두 번째 인물 등장의 배경입니다. 국제적으로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탈루액이 약 2.5조 달러가 넘는다는 것이 일반적 추정입니다. 스위스의 대형 금융사들은 국제적으로 영업망을 이용하여 고액소득의 고객들에게 스위스 내 익명계좌 개설을 돕는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알려져왔습니다. 미국 납세자들 계좌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던 미국 정부에게 자국의 고객정보보호법을 방패 삼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스위스의 대응이 미국인 브래들리 버켄펠드의 등장으로 일대 전기를 맞게 됩니다.

미국은 2006년 불법탈세에 대한 정보제공으로 징수된 세금의 30% 범위에서 제보자에게 포상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2007년 약 5년 간 스위스 대형은행 UBS에 재직했던 버켄펠드가 재직 시 미국 부자들의 탈세를 지원했던 업무 내용을 미국 당국에 털어 놓았습니다. 자국 내 영업허가 취소를 위협하는 미국 정부와 협상을 통해 UBS는 5천 명에 가까운 미국인 고객의 정보를 제공하고, 국체청(IRS)과 증권감독원(SEC)에 각각 7.8억과 2억 달러의 합의금을 냅니다.

IRS는 이 명단을 바탕으로 약 50억 달러의 탈루 세금을 징수합니다. 버켄펠드는 40개월의 실형을 살지만 정보제공의 대가로 2012년 1.04억 달러(약 1200억원)의 포상금을 받습니다. 그는 근래 프랑스에서 UBS의 탈세조장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는데 프랑스의 경우 예상 벌금액이 약 60억 달러에 근접하는 엄청난 액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스위스 금융사들의 미국 내 영업을 지렛대 삼은 미국의 계속된 압력에 2010년에 제정된 미국의 관련 법(FATCA, 해외계좌납세순응법)의 절차에 따라 미국 납세자들의 금융정보를 미 정부 당국에 제공하기로 합니다. 프랑스와 독일 등과 같은 유럽의 주요국들도 미국과 비슷한 투명성을 확보했지만 스위스 금융정보는 공식 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나라들에게는 접근 불가입니다. 2015년 현재에도 스위스는 국제민간감시기구인 조세정의네트워크가 메기는 은행비밀지수 1위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스위스 은행들의 외국인 계좌가 2008년 이후 몇 년 간 줄다가 그 이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마약·무기 등 국제적인 암거래 자금세탁에 대한 우려가 많습니다. 스위스의 약화된 위상 탓인지 홍콩, 싱가포르 등이 조세회피처 면모를 더 강화하고 있는데 스위스 금융사들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어 보입니다. 싱가포르는 근래 국제경제협력기구(OECD)가 우려를 표할 만큼 은행 내부정보 유출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는데, 스위스 은행들이 싱가포르를 제일 큰 해외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익명 계좌를 이용하는 국내 고객에게는 여행거리가 짧아져 반가운 일일지 모르죠.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비트코인의 확산에 기여한 특징의 하나가 거래의 익명성입니다. 그런데 익명성이 보장된 금융 거래에 대한 수요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이런 거래를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그 규모가 커지지 않도록 하려는 국제적인 공조가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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