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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기록을 싫어할까
김홍묵 2017년 10월 27일 (금) 00:06:56

한국인은 기록하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명확한 통계자료나 비교수치가 있지는 않지만, 오래전부터 자주 듣고 입에 오르내리던 소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항설은 붓끝으로 적은 글을 꼬투리 삼아 유배나 참형·멸문·부관참시 같은 끔찍한 형벌을 내린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필화(筆禍)입니다.
필화는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위직에 내정된 사람이 표절 시비로 낙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기록이 생사를 가르는 화근이랄까···.

표절뿐만이 아닙니다. 수첩에 적은 사람 이름, 컴퓨터 이메일, 휴대전화로 주고받은 문자나 카카오톡 교신, 고위층 회의석상에서 적은 메모가 빌미가 되어 수사기관에 불려가거나 구속되는 일이 속속 벌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종이에 적은 글은 태워 없애버릴 수도 있지만 기계에 입력된 글은 지워도 복원이 되니 수사기관으로서는 최고의 증거이자 ‘정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범인들마저 글쓰기를 꺼려하고, 직언·직설을 회피하는 게 현실입니다.

필화는 500여 년 전후 벌어진 잇단 사화(士禍)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합니다. 조선조 손꼽을 태평성대인 세종·성종 조가 지나자 암울하고 유약한 왕을 중심으로 훈척(勳戚)·권신(權臣)세력과 사림(士林)간의 극렬한 대립 끝에 숱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4대 사화, 즉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 중종 대의 기묘사화(1519), 명종 시절의 을사사화(1545)를 거치면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5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 참조)

사화는 ‘사림의 화’를 줄인 말입니다. 사림은 세조의 쿠데타 이후 전횡을 휘둘러온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성종이 대거 등용한 이후 정치세력화한 지식인 중심의 사족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의 도덕적 실천을 표방하고 토지를 사유화한 척신 등 기득권 세력의 권력 독점을 뒤엎으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되고 화를 입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림 세력은 성종 시절 김종직 문하의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 영남 사림파와 중종 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영남·기호지방 학자들입니다.

# 사초(史草) 기록이 발단이 된 무오사화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언론 담당 삼사와 왕의 고문역을 점유한 사림파에 눌려 지내던 훈척세력은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등극하자 사림파 말살의 꼬투리를 발견했습니다. 성종실록 편찬 책임을 맡은 이극돈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자신을 비판한 상소문을 찾아낸 것입니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폐한 것을 두고 항우룰 비판한 제문인데, 이극돈은 이를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은유적으로 비난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극돈은 김종직과 원수지간인 유자광과,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윤필상 등을 끌어들여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원래 학문을 싫어하고 언론을 귀찮게 여기던 연산은 사림들을 국문하여 사림파에 철퇴를 내렸습니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 김일손 등은 능지처참, 정여창·김굉필 등 수많은 선비는 귀양 보냈습니다.
무오사화는 다른 사화와는 달리 사초가 원인이 되어 사림들이 대대적으로 화를 입은 사건이어서 사화(史禍)라고 씁니다.

# 가장 잔인하고 희생이 많았던 갑자사화

사림파가 완전히 제거되자 연산은 거리낌 없이 사치와 향락 패륜을 일삼아 국고가 거덜 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정부·육조 중심의 부중파(府中派) 공신들에게 공신전 반납을 요구하고 노비를 몰수해 그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그러나 임사홍 등 외척 중심의 궁중파는 훈구·잔여 사림 모두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연산이 모르고 있던 생모 윤씨(성종의 계비) 폐비 사건을 밀고해 끝내 조정은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친모 윤씨의 사사를 알게 된 연산은 갑자년에 엄청난 살인극을 벌입니다.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참하고 정씨 소생인 안양군·봉안군을 사사하는 한편,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절명케 했습니다. 이어 폐위에 찬성했던 윤필상·김굉필 등 10여명은 참살, 한명회·정창손 등은 부관참시했습니다.또한 수많은 공신과 선비를 참혹하게 치죄하는가 하면, 그 가족 자녀들까지 연좌하여 죄를 물었습니다. 무오사화 이후 사관들이 사초 제출을 꺼려 '연산군일기'의 내용이 부실한 것도 필화 공포의 소산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 문자참(文字讖)에 희생된 조광조의 개혁

성희안·박원종 세력의 쿠데타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들 반정공신들의 전횡을 억누르기 위해 신진 사림들을 대거 기용했습니다. 그 중심에 조광조가 있었습니다. 무오사화로 죽은 김일손의 수제자인 조광조는 도학정치를 앞세워 과격한 개혁정책을 폈습니다. 공신 76명의 훈작 삭탈, 유학적 도덕관을 앞세운 향약(鄕約) 실천 강제, 과거제 폐지와 인재 추천제 현량과(賢良科) 신설로 추종세력 기용, 궁중 여악(女樂) 금지, 내수사의 고리대금업 중지 등입니다.

위기에 몰린 훈구파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했습니다.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쓰고 벌레가 갉아먹게 한 문자참입니다. 조(走+肖)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참소입니다. 남곤·심정 등이 주축이 된 이 고변에서 조광조 일파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거나 자결했습니다. 사림파 수십 명이 귀양길에 오르고 파직당했습니다. 조광조가 ‘소인배’로 비난하고 공신 자격을 박탈한 남곤, 탄핵을 받은 홍경주 무리가 모함·무고로 일으킨 이 궁중 쿠데타가 바로 기묘사화입니다.

# 척신세력 간 피를 부른 을사사화

명종 원년 왕실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소윤)가 윤임 세력(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 을사사화입니다. 윤임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인종의 외숙, 윤원형은 다른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낳은 명종의 외숙입니다.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죽자 소윤파는 대윤파를 역모로 무고해 윤임은 물론 대윤 쪽에 몰려 있던 수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했습니다. 윤원형은 2년 뒤 사림과 윤임 세력 잔당 제거를 위해 정미사화(1547)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했습니다. 정치적 조작극입니다.

정미사화는 윤원형 일파가 고의로 정치 쟁점화한 정적 숙청 사건입니다. 부제학 정언각 등이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보를 발견, 왕에게 보고한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컫습니다. 윤원형은 이를 빌미로 자신을 탄핵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노수신 등 20여 명을 유배시켰습니다. 윤원형은 남매간인 문정왕후가 죽은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친형 윤원로 사사, 노비 출신 애첩 정난정과 공모해 본부인 독살, 남의 노예와 전작 약탈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 권력투쟁, 결국 임란(壬亂)으로 이어져

이렇듯 권력투쟁은 삼정의 문란, 국력과 재정의 악화, 민심의 이반을 몰고 왔고, 틈새에 낀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었습니다. 국정이 문란해지자 북쪽에선 여진족 침범이 잦아졌고, 남쪽에선 왜구들이 전남 장흥·강진·영암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을묘왜변(1555)이 일어났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들고 임꺽정 등 도둑떼가 곳곳에서 발호했습니다. 권력을 잡고 권세를 휘두르던 사화의 주모자들도 대부분 온전한 죽음을 맞지 못했습니다. 끝내는 임진왜란(1592)을 부르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서구에서는 콜럼버스,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의 신대륙 탐험으로 아메리카·인도·아프리카 식민지 쟁탈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또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 이탈리아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영국 작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탄생했습니다.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1543)했고, 스페인의 마젤란은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했습니다. 서세동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조개와 도요새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싸우는 방휼지쟁(蚌鷸之爭)은 어부 좋은 일만 시켜줄 뿐입니다. 한반도는 초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끼리 안에서 지지고 볶고 하는 사이 강대국들은 구워먹을까, 삶아먹을까, 아니면 회 쳐 먹을까 궁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자국 이익이 우선이니까.
요즘은 논거와 요식을 갖춘 상소제도조차 없어지고, 오로지 막말만 횡행하니 세상이 더 스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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