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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여자
신아연 2017년 08월 01일 (화) 00:43:47

약 25년 전 호주로 이민 가 살 때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마다 오렌지를 ‘탐하던’ 기억이 납니다. 여행사에서 호주에 가면 가급적 오렌지를 많이 먹고 오는 게 '남는 여행'이라고 했다네요. 저 역시도 오렌지의 감미롭게 달콤하고, 오묘하게 새콤하며, 신비하게 청량하던 이국의 맛에 한동안 반했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오렌지는 현지에 가서나 맛볼 수 있는 생경하고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살고 있는 지금, 지천으로 깔린 오렌지에 격세지감이 절로 드는데, 이번에는 아보카도를 보면서 곧 비슷한 감상이 들 것이라 예감하게 됩니다. 이 녀석의 독특한 생김이나 기묘한 맛은 오렌지에 비할 바가 아닌 데다 사람에 따라 기관지와 위장 등에 이물 반응을 일으켜 응급실에 실려 가게 만든다니 탄환처럼 단단한 씨의 옹고집 탓인지 신토불이에 대한 신고식이 요란하다 싶습니다.   

호주에서 그 맛에 반했으나  잊고 지낼 수밖에 없다가 한국의 장터에서 4, 5년 만에 다시 본 아보카도는 마치 헤어졌다 만난 친구처럼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어찌 오렌지와 아보카도뿐일까요? 소위 서방 선진국에서 우리의 문지방을 넘은 것들 중, 언뜻 생각나는 것만 들자면 커피 전문점이 그렇고, 카트를 끌고 다니는 대형 마트가 그렇고, 밤 한 톨조차 개수가 아닌 무게를 달아 파는 농축수산물 등이 그렇습니다.

호주에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진공 포장한 닭 한 마리에 '다리 네 개 닭'이란 라벨을 붙인 것을 보고 유전자 조작으로 생산된 것인 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다리 네 개짜리 닭은 온 닭 한 마리에 다리 두 개를 더 넣은 것, 말하자면 '남의 다리'를 끼워 파는 것이었습니다. 값이야 다리 두 개 값만 더 받으면 그만이니 지금 생각하면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요즘 한 텔레비전 방송사의 개그프로그램 중에 ‘미래에서 온 남자’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약 10~20년 후의 '미래에서 온 여자'가 바로 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미래가 반드시 서방 선진국의 모방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서양 문물이 하나하나 들어오는 현실을 보면 아주 억지소리만은 아닙니다. 오렌지와 아보카도가 증명하듯이, 저로서는 10, 20년 전에 이미 경험한 것을 한국에 다시 돌아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재경험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관한 한 호주에서 미리 맛보거나 체험한 것 거의 다가 곧 한국에 상륙하리라는 걸 예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미래에서 온 여자인 거지요.

실상 특별히 예견하고 말 것도 없이 거의 다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유입되는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어서 사소한 물품까지 속속 일상 속으로 스며듭니다. 그렇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용, 여유 있고 검소한 생활 태도, 몸에 밴 독서 습관, 세련된 매너와 에티켓 등 그네들의 정신문화는 언제쯤 들어오게 될까요? 들어오기는 들어오는 걸까요? 시기적으로 이미 들어왔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왜 그런 건 아예 안 들어오거나 이렇게 더디게 들어올까요?

물질적 풍요와 현란함에 비해 우리의 정신세계는 오히려 더 초라하고 빈곤한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우울하고 걱정이 됩니다. 우리 고유문화도 지키지 못하고 서양의 좋은 것도 받아들이질 못하니 정신과 의식 세계의 위축은 인간 본성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건축미와 도시 미관을 조롱하고 자연 경관을 해치는 원색적이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간판과 표지판 등은 우리의 추락하고 있는 미의식의 상징 같아 보기에 고통스럽습니다.

반만년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정신적 유산을 거덜 내게 되었는지 참담하기만 합니다. 자칭 미래에서 온 여자가 이렇게 되물어선 안 되겠지만 언제쯤이면 우리의 일상에서 정신과 물질생활이 균형을 이루는 ‘참살이’가 회복될 수 있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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