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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이유 여사의 검소한 장례
정달호 2017년 07월 19일 (수) 00:10:54

지난 6월 30일, 향년 89세로 타계한 시몬 베이유(Simone Veil, 1927~2017) 여사의 장례식 장면을 프랑스 티브이(tv5)를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국장(國葬)이라고 하는데 앵발리드(Invalides, 전쟁 박물관, 나폴레옹의 묘가 있음)의 안뜰, 돌로 포장된 넓은 광장 한복판에 삼색기로 덮인 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비교적 먼 거리에서 엠마누엘 마크롱 대통령과 전현직 요인들, 자식들을 비롯한 가족과 친지 3백여 명이 관 주위를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었지만 흔한 꽃 장식 하나 없는 검소한 장례식장이었습니다. 보통의 장례식이라도 이렇게 조촐할 수 있을까 싶은데 명색이 국장인 국가 행사가 이렇게 단출한 모습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생각은 잠시였을 뿐 화환이나 만장 등 다른 설치물이 없어 식장이 오히려 고졸(古拙)한 분위기인 데 더해, 무엇보다 고인의 관을 덮고 있는 삼색의 프랑스 국기가 식장을 압도하면서 숙연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고인의 관에 조국의 국기를 덮는 것 이상으로 국가가 주는 영예를 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장에서는 일반 장례식처럼 주변부터 화환이 넘쳐나지만 과연 고인의 관이 무엇으로 덮여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도 흰 국화꽃으로만 장식되고 관 어디에도 태극기의 모습은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국장,국민장에관한법률’에도 국기로 관을 덮는다는 규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국가에 영예롭게 헌신했다고 해서 국장을 치르는 것이라면 국가의 상징인 국기로 그 관을 장식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시몬 베이유 여사는 대통령이나 총리를 지낸 사람도 아닙니다. 유대인인 그는 나치 점령기인 17세 때 부모형제와 함께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가족을 거의 다 잃고 전쟁이 종료됨으로써 생명을 구제받은 기구한 운명을 겪은 여성입니다. 그런 경력으로 프랑스 홀로코스트 재단(Fondation pour la Memoir de Shoah) 이사장을 오래 맡기도 했습니다. 엘리트학교를 나온 변호사로 법무부에서 일하다가 후일 보건장관을 역임(1974~1979)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1979년 유럽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바로 의장을 맡아 유럽통합이라는 유럽 국가들의 소망을 공고히 하는 데도 기여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이 양차의 대전을 겪으면서 처했고 그 자신도 처절하게 맞아야 했던 절망적인 삶에서 영구히 탈피하도록 하겠다는 신념에 따라 유럽통합의 지도자로 나선 것입니다. 그는 2008년 이래 프랑스 지식인으로서 가장 큰 영예인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emie Francaise) 회원이기도 했는데 여성으로서는 여섯 번째였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차지했던 여러 관직이나 사회적 지위 때문이 아니라 그가 프랑스와 유럽, 나아가 인류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자 헌신적으로 노력해온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75년 그가 선구적으로 나서서 법으로 채택하게 된 임신중절 합법화입니다. 그는 당시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보수 세력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관철시켰으며 이후에도 프랑스 사회에서 원로로서 줄곧 부끄러움 없이 살았기에 평생토록 프랑스인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관직으로는 장관 정도를 지내고서 사회를 위해 아무리 훌륭한 활동을 했더라도, 이런 인물이 사후에 국장이라는 국가적 영예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물이 무슨 활동으로 사회에 기여했는가보다는 국가나 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했는가를 더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로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에게만 국장을 적용하는 관례가 형성돼 왔을 것입니다.

시몬 베이유 여사는 국장을 마치고 바로 팡테옹에 남편과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팡테옹은 장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볼테르, 장 조레스(레지스탕스 지도자)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안치되어 있는 곳으로 프랑스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입니다. 두고두고 뭇 사람들이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이어야 그곳에 안치될 수 있습니다. 100여 명 못 되는 인물들 대부분이 남성인데 여성으로는 다섯 째이며, 본인 자격으로 팡테옹에 안치된 걸로는 마리 퀴리 부인에 이어 두 번째라 합니다. 보통은 사후 상당 기간이 지나 사회적 평가가 확실히 자리 잡은 후에 기존의 묘에서 이장해오는 것이 관례인데 시몬 베이유 여사는 국민적 청원을 바탕으로 국장 이후 바로 안장된 케이스입니다. 1885년에 타계한 빅토르 위고(1802~1885)도 거국적인 장례식 후 바로 팡테옹에 안장된 매우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비교적 근래에 팡테옹에 들어간 인물 중 잘 알려진 사람은 1996년 앙드레 말로(사후 20년에 이장)와 2002년 알렉상드르 뒤마(사후 132년에 이장)가 있습니다. 뒤마의 경우는 특이합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나서서 프랑스의 대문호를 팡테옹에 모시지 않는 부정의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고 하여 사후 132년 만에 기존의 묘에서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합니다. 보통 사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 팡테옹 이장이 결정된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의 평가를 충분히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뒤마의 경우는 아무리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그른 일은 국가가 나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팡테옹에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사들의 유해를 안치하는 것 외에 다중의 특별한 사회적 공로를 인정하여 그들에게 헌정하는 플라크를 새겨 벽에 거는 경우도 있는데 역시 시라크 대통령 때인 2007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이 플라크는 전시 점령기간 중 수용소로 보내질 뻔했던 수많은 유대인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보호하여 안전하게 살려낸 2,600명 이상의 보통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플라크는 이들의 위대한 행적을 언급하면서 프랑스의 명예와 정의, 관용, 인간애(humanite)라는 프랑스의 가치를 구현한 ‘정의로운 국민들’(Juste parmiles Nations)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팡테옹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입니다. 팡테옹 건물 중앙에 ‘위대한 인물에게 감사하는 조국’(Aux Grands Hommes, la Patrie Reconnaissant)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팡테옹은 위대한 인물들이 지켜낸 프랑스의 가치를 상징하는 장소로 국민들에게 각인돼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따라야 할 표상으로서 위대한 인물들을 안장하고 있는 팡테옹은 후세를 위한 교육의 장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현충원이 있고 인물별로 기념관이 있기는 하지만 프랑스의 팡테옹과 같은 거부할 수 없는 위엄과 무게를 지닌, 나아가 국민 누구나 언제라도 들러 볼 수 있는 그런 상징적인 장소를 만들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문화가 다르고 역사가 다른데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일은 아니겠지만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씁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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