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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가슴에 쓰는 시
임철순 2006년 11월 29일 (수) 00:00:00
#저는 고영상 동생 고혜자입니다. 1970년 5월에 세상을 떠난 우리 오빠를 기억하시는지요? 이렇게 불쑥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오빠묘소를 지난 일요일에 정리해서 화장했습니다. 이 세상에 오빠의 흔적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오빠의 모교 홈페이지를 찾아 보고 총무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중략)

무덤을 파니 오빠는 뼈만 남았더라고요. 정다웠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한 오빠가 너무 가여워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네요. (중략)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누려 보지도 못하고 꽃봉오리를 피우지도 못하고 인생의 큰 꿈을 펴 보지도 못하고 사랑도 못 해보고 떠난 불쌍한 우리 오빠를 기억해 주세요. 오빠와 친했던 분들, 친하지 않았던 분들 모두 기억해 주세요.

오빠의 사진 등은 친정집이 수해를 입어서 없어졌습니다. 오빠의 죽음 이후로 우리 집은 점점 더 형편이 어려워져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차차 나아졌습니다. 아버님은 19년 전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83세로 정정하게 저의 가족과 함께 살고 계십니다. 오빠 몫까지 오래오래 사시라고 그러지요. (중략) 힘들었던 지난날 저를 지탱했던 힘은 죽은 오빠몫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보성 60회 오빠 친구분들도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오빠와 동기생인 구순모입니다. 솔직히 영상이와는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일부러 글을 올리게 된 것은 동생분의 오빠 그리워하는 마음이 참으로 절절하여 무엇인가 답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글 쓰는 것과 매우 거리가 멀어 업무상 외에는 글을 별로 써 본 적이 없는 제가 놀랍게도…). 그리고 그 애절한 마음을 동기회 홈페이지에 올려 저희 동기들이 한 식구가 된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구요.

동생분의 글을 읽다가 영상이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아 동기생 수첩을 뒤져서 사진을 찾아 보고, 그리고 다시 글을 읽었습니다. 저희 동기생들이 다 그리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희들의 마음이야 동생분의 오빠 그리워하는 아픔에 비교도 되지 않겠지만 동생분의 글, 마음이 저희들의 가슴에 남아 영상이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기억할 것으로 믿습니다. 오빠를 그렇게 그리워하는 동생을 가진 영상이는 정말 행복한 친구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제 글을 많이 읽어 주시고 오빠의 명복을 빌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오빠가 저 세상에서 흐뭇해 할 것 같네요. 어머니에게 댓글도 다 읽어 드리고 구순모 오빠의 글도 읽어 드렸어요. (중략)

그 때에는 왜 그리 못 살았는지 여유로운 지금, 오빠가 더 불쌍합니다. 이렇게 좋은 시절을 누려 보지도 못하고. 어머니는 그 때 너무 많이 슬퍼하셔서 그런지 화장할 때는 초연하셨습니다.(중략) 전자앨범 속의 우리 오빠는 어릴 적 그대로인데 오빠들은 많이 달라졌네요. 더욱 건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고등학교 동창회 홈페이지에 떠 있는 편지 세 통을 거의 그대로 옮겼습니다. 나도 그리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영상이가 또렷이 생각납니다. 20여일 전 그의 동생이 우리 사이트에 글을 올리자 여러 명이 댓글을 붙여 추모하며 다시 명복을 빌었습니다.

특히 구순모라는 친구는 그 동생에게 편지를 쓰면서 류시화의 <눈 위에 쓴 시>를 인용했습니다. 아침에 운동하러 가는 산의 나무판에 누군가 새겨 놓은 시랍니다.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그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무리를 해서라도 타인의 머리에 자신을 각인시키려고 아우성치는 세상사람들에게 그것이 부질없고 의미없는 헛된 짓임을 알려주는 것 같아서랍니다. 영상이도 아무 기억도 남기지 않는 게 제일 현명하고 멋있는 것임을 미리 알고 그리 먼저 간 것 같다는 말도 말했습니다.

영상이의 동생은 이 시를 어머니에게 읽어 드리면서 목이 메었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기 마련이라지만 오빠의 짧은 삶이 너무 허망하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슬픔은 슬픔이 잊혀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 위에 쓴 시는 사라지겠지만, 가슴에 쓴 시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글을 쓰는 일은 기교가 아니며 마음과 감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됩니다.

이번 자유칼럼은 이렇게 남의 글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보람있는 것 같습니다. 실명을 그대로 인용한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우리 고교동기들은 이번에 여동생회원을 얻었습니다. 친구들 모두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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