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한 달 동안 여러 곳에서 한국화가 고 황창배(黃昌培, 1947~2001) 회고전이 열렸습니다. 동덕여대 박물관, 이화아트갤러리와 이화아트센터 등지에서 열린 회고전 주제는 ‘무법(無法)의 법을 그리다’였습니다. 9월 6일이 그의 15주기였습니다.
“파격과 일탈로 한국화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처럼 생전의 황창배는 ‘한국화의 테러리스트’, ‘탈(脫) 장르의 리더’, ‘무법(無法)의 자유주의자’로 불렸다 합니다.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문외한의 눈에도 ‘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시절부터 그와 가까이 지냈던 동창들 사이에는 새삼 너무 일찍 떠난 그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글들이 한동안 오갔습니다. 1978년 서른하나의 이른 나이에 국전 대통령상을 받은 그에게는 혁신적인 신예 작가라는 찬사가 쏟아졌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비방과 시샘도 없지 않았던가 봅니다. 어쨌든 한국화 비구상이라는 당시로서는 너무도 생소한 화풍이 뜻하지 않게 많은 비판과 적을 만들었습니다. 그 자신을 외롭고 고달픈 길로 내몰게 된 것입니다. 친구들은 그가 교수직을 버리고 음성 시골에 파묻힌 것, 그림에만 매달리다 췌장암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도 화단에서 얻은 스트레스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선구자는 언제나 외롭고 고달프게 마련이야.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하니까.” “타인의 무지와 질투, 미움이 간접살인이 될 수도 있지.” 그런 말끝에 “모차르트도 살리에리의 질투 때문에 요절했다.”는 소리까지 나왔습니다. 별 소양이 없는 그림 이야기에 입도 뻥긋 못하다가 ‘살리에리 증후군’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오래전 읽었던 푸시킨의 희곡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살리에리 배역의 배우가 열연하던 영화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살리에리 얘기는 글로 한번 써 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e)은 주변의 뛰어난 인물 때문에 느끼는 열등감, 시기, 질투심 등의 증상을 말합니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가 평생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끝내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독살하고 만다는 줄거리의 영화 <아마데우스> 이후에 생겨난 용어랍니다.
 
문제적 인물 살리에리가 세상을 뜬 6년 후인 1831년 러시아의 천재적 이야기꾼 푸시킨(Aleksandr Seraggvitch Pushkin, 1799~1837)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흥미로운 희곡을 발표합니다. 여섯 살 연상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에 대한 질투심을 못 이겨 독살한다는 내용, 바로 ‘살리에리 증후군’의 원전입니다.
 
살리에리: 모든 사람들은 말하지. 지상에 정의는 없다고. 그러나 정의는 천국에도 없어. 내게는 이 사실이 기본음처럼 너무나도 명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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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강한 살리에리가 언젠가 경멸받을 만한 질투자였고, 사람들에게 밟혀 꿈틀거리며 모래와 먼지를 무력하게 갉는 뱀이었던 적이 있다고 그 누가 말하랴? 아무도 못한다! …
그런데 지금 스스로 말한다. 내가 질투자라고. 나는 질투하고 있다. 몹시도 고통스럽게 질투한다. …
오, 하늘이여! 신성한 재능이, 불멸의 천재가 불타는 사랑과 자기희생과 노동과 성실과 기도의 대가로 주어지지 않고 어리석은 바보, 허랑방탕한 자의 머리를 비춘다면 어디에 정의가 있나요? …
오, 모차르트, 모차르트!
 
푸시킨이 쓴 살리에리의 독백입니다. 이어서 독을 넣어 마시게 하는 장면까지 그려냅니다. 독살에 대한 살리에리의 심경까지도.
 
살리에리: (모차르트의 잔에다 독을 넣는다.) 자, 마시게.
모차르트: 자네의 건강을 위해, 친구. 화음(和音)의 두 아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결합하는 진정한 유대를 위해. (마신다.)
살리에리: 이 눈물, 나 처음으로 흘리네. 가슴 아프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하네. 마치 내가 어려운 의무를 이행한 것처럼. 마치 수술 칼로 아픈 데를 잘라낸 것처럼.
 
이렇게 완벽한 살리에리 독살의 희곡을 바탕으로 극작가 피터 셰퍼(Peter Shaffer, 1926~2016, 영국)가 1979년 <아마데우스>라는 극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 극본으로 밀로스 포먼(Milos Forman, 1932~, 체코) 감독이 1985년 화제의 영화 <아마데우스>를 만들어냅니다. 영화에서 살리에리 역을 맡은 머레이 아브라함(Murray Abraham, 1939~, 미국)은 모차르트와의 애증을 더욱 실감 나게 열연해 관중들의 뇌리에 살리에리의 독살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처럼 각인했습니다. 결국 살리에리 증후군은 푸시킨, 셰퍼, 포먼, 아브라함의 합작품인 셈입니다.
 

과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을까요? 베네치아 출신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뒤늦게 빈에 들어왔을 때 이미 궁정 오페라 감독으로 탄탄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모차르트의 천재성보다 살리에리의 성공이 더 빛났습니다. 오히려 너무 잘 나가는 살리에리에 대해 모차르트가 적잖은 불평을 털어놓았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둘 사이의 초기 다소 불편했던 관계에 뜻하지 않은 모차르트의 단명이 당시 일부 의심스러운 풍설의 진원이었을지 모릅니다.
 
궁정 악장이던 살리에리는 1788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모차르트의 미사곡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모차르트가 죽은 후 아내 콘스탄체는 아들의 음악 교육을 살리에리에게 맡겼습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체르니 등도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깊은 존경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고아로 남의 도움을 받으며 어렵게 자란 살리에리는 자신도 대부분의 제자들을 무료로 가르친 온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세상에 살리에리의 독살설을 퍼뜨린 주역 푸시킨의 지독한 장난기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과 사탄과 천사에게 윤간당한 여인으로 그려낸 이야기꾼입니다. 1830년에 발표한 서사시 <가브릴리아다>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갑자기 뱀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고 그녀 앞에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 마리아는 자신의 발아래 아름다운 청년을 보았다. 그는 눈에 이상한 광채를 띠며 그녀를 응시하고 아름다운 말로써 무엇인가를 청한다. 한 손으로는 그녀에게 꽃을 바치며 다른 손으로는 소박한 옷을 구기며 서둘러 옷 주름 밑으로 기어든다.
말을 잃은 그녀는 갑자기 힘이 빠져서 겨우 숨을 쉬면서 애타는 두 눈을 감고 악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아! 소리 지르며 풀밭에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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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어느새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아름다운 여자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한숨을 쉬었으며 가브리엘은 그녀에게 키스하였다.
‘이러지 마세요!’ 마리아는 속삭였다. 바로 그 순간 애무로 뒤덮여 버렸다. 순결한 처녀의 마지막 외침과 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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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하얀 털북숭이 날개가 달린 사랑스러운 비둘기가 창문 안으로 날아 들어와 그녀 위를 이리저리 날며 빙빙 도네. 기쁨의 노래를 하는가 싶더니, 에, 갑자기 사랑스러운 처녀의 무릎 사이로 날아와 장미 위로 내려앉아 몸을 부르르 떨더니 쪼고 푸드득거리며 몸을 돌려가며 부리와 발로 안간힘을 쓰네.
그야, 바로 그야. 마리아는 알았다. 그녀는 비둘기로 변장한 다른 남자를 받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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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마리아는 잠시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웬 소동인가? 한 명, 두 명, 세 명! 그들은 꺼리지도 않나? 난 잘 참아냈다고 말할 수 있어. 난 같은 날 하루 동안에 연이어 사탄과 대천사와 신의 것이 되었으니…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은 이렇게 지독한 이야기꾼 푸시킨에 의해 세상에 퍼진 것입니다. 독살설의 배경을 이해한다면 살리에리에게 씌워진 누명도 당연히 벗겨 주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오로지 흥미 추구를 위해 실존 인물들을 천사와 악마로 나누고, 역사적 사실조차 왜곡하는 작가의 지나친 상상력과 추리력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18세기 빈의 살리에리뿐이 아닙니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더욱 빈번히 억울한 살리에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 날 몇몇의 악의적인 입방아에 오르내리다 보면 한순간에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세상입니다. 근거도 없는 헛소문이 금세 SNS를 통해 사방팔방으로 번져 나갑니다. 한번 심판대에 오르면 아무리 해명해 봐야 들어줄 사람도 없고 헤어날 길도 없습니다. 이런 억울하고 한심한 일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도 없는 헛소문에 더욱 귀를 쫑긋거립니다.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신문 방송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된 이야기를 분별없이, 무책임하게 전파해 독자와 시청자를 오도합니다. 근거가 불확실한 이야기를 확인도 하지 않고 출처도 밝히지 않고 퍼뜨리는 일은 죄악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 대한 반작용으로 얼마 전부터 살리에리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체칠리아 바르톨리, 디아나 담라우 등은 살리에리 앨범을 내놓아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살리에리처럼 근거 없이 매도되었던 인물이 누명을 벗는 경우 그에 합당한 심리적, 혹은 사회적 용어도 마땅히 생겨나야 할 것입니다.
 
* 이 글은 근거 없는 헛소문을 경계하자는 주장일 뿐 모차르트의 천재성이나 황창배의 독창성, 또 이들의 요절에 대한 안타까움에 어떤 폄훼의 뜻도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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