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2일 서울 국방부 체육관에서 동티모르 방위군 군악대가 멋진 유니폼을 입고 그들의 국가(國歌)인 ‘파트리아(祖國)’를 연주했습니다. 외국 땅에서 역사적인 첫 연주를 마친 대원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는 소식을 접하니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국 땅을 밟은 동티모르 군악대 대원 25명 대부분은 악기를 전혀 다룰 줄 모르는 ‘왕초보’였다고 합니다. 그런 그들이 한국 군악대의 도움을 받아 악기를 처음 손에 쥔 지 40일 만에 ‘보란 듯이’ 자신들의 국가를 연주했다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연주회를 마치고 보름 후인 11월 28일 그들은 신생 독립국 동티모르 최대 기념일인 ‘포르투갈 상륙 및 천주교 복음 전파 500주년’ 행사에 맞춰 서둘러 출국했다고 합니다.
 
동티모르 군악대 소식을 듣고 며칠 후 필자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에 자리한 외국인 묘역을 찾아갔습니다. 때마침 초겨울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의 정취는 차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마치 필자의 묘역 참배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한 날씨였습니다. 묘역 안내소에 들러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의 묘소를 찾아왔다”고 하자 젊은 안내인이 친절하게도 묘지가 있는 곳까지 동행해주겠다며 길을 나섰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프란츠 에케르트가 누군지 아느냐고 묻자 안내인은 악장이 지휘하는 손짓을 하며 말했습니다. “독일 음악가죠.” 순간, 그 젊은 안내인이 너무나 대견스러워 손이라도 꼭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우리는 프란츠 에케르트가 영면하고 있는 묘소 앞에 도착했습니다.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있는 프란츠 에케르트 묘소와 묘비

묘소는 비교적 단정하게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서 있는 비석에는 ‘여기 하나님의 품에 프란츠 에케르트 잠들다(Hier ruht in Gott Herr Franz Eckert)’라는 큰 글씨 하단에 ‘프로시아 왕국의 음악 감독, 출생 1852. 4. 4. / 사망 1916. 8. 6. (Kgl. preuss Musikdirektor geb. den 5. April 1852 / gest. den 6. August 1916)’이라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금년은 프란츠 에케르트가 우리나라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지 꼭 100년 되는 해입니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1879년 일본 해군의 초청을 받아 일본 땅에서 작곡가, 교육자, 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1880년 11월 일왕 메이지의 생일잔치 때 처음 연주된 ‘기미가요’는 바로 그가 작곡한 것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기미가요’는 훗날 일본의 국가(國歌)로 지정됩니다. 근 20여 년간 일본에서 활동하던 그는 건강 문제로 귀국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곧 민영환(閔泳煥, 순국지사, 1861~1905)의 동생 민영찬(閔泳瓚, 육군부장, 1873~미상)의 초청을 받아 1901년 2월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습니다. 이때 그는 50인조 군악대가 사용할 많은 악기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팔수와 고수(鼓手) 등 32명으로 구성된 군악대를 편성해 6개월간 연습시킨 후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비문을 읽는 필자의 눈에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115년 전인 1901년 9월 7일 고종황제 50회 생신인 만수성절에 즈음해 경운궁(慶運宮)에서 최초의 서양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에 서양 음악의 뿌리가 내리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1902년 민영환이 작사하고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를 국가로 제정합니다.
 
우리나라의 서양 음악은 이처럼 ‘어설프게’ 첫발을 뗐습니다. 하지만 한 세기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우리는 이미 전 세계에 클래식은 물론 K-pop의 명성까지 떨쳐 당당하게 음악 일류 국가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일관되게 인정하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지난해에는 우리의 젊은 피아니스트 조성진(1994~ )이 거장 쇼팽(F. F. Chopin, 1810~1849)을 기리는 ‘바르샤바 피아노 콩쿠르’에서 당당히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프란츠 에케르트가 100여 년 전 심은 작은 묘목 ‘대한제국 군악대’가 오늘 큰 거목으로 성장했듯 우리가 심은 음악의 씨앗 ‘동티모르 군악대’도 크게 자라나길 기대해봅니다. 100년 후 동티모르 출신 음악가가 세계 음악계에서 이름을 떨칠 날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