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회의 안타까운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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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회의 안타까운 중단

황경춘

2015년 10월 22일 (목) 00:08:02

저희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3년, 그러니 조국 광복 2년 전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일제가 패전의 길로 치닫던 어수선한 시절이었습니다. 몇 사람은 일제의 징병으로 끌려가고, 몇 사람은 얼마 후 일어난 한국동란으로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전후 복구와 급속한 산업화, 두 번의 혁명과 처절한 민주화 투쟁 등, 되찾은 조국이 숨 쉴 사이 없이 달려오는 동안 세월은 흘러, 어느덧 학창을 떠난 지 한 세기가 가까워졌습니다. 1980년대 후반의 어느 해, 모교 개교기념일 행사에 모인 동기생 몇 사람의 발안으로, 졸업 50년이 되는 1993년에 살아남은 동기생끼리 기념문집을 발간하기로 했습니다.

글쓰기를 싫어하는 친구들을 독촉하여, 무모하다고 말리는 몇 사람의 반대를 누르고 ‘비봉(飛鳳)을 떠난 지 五十年‘이란 동기생들의 기념문집이 1993년 4월의 개교기념일 행사에 맞추어 발간되었습니다. ‘비봉’은 모교 바로 뒤에 있는 나지막한 산으로 교가 첫머리에도 나오는, 우리들 5년 동안의 학창생활 중 늘 우리 가슴에 살아 있었던 산 이름입니다.

1938년에 입학한 110명의 동기생 중, 그때까지 살아남은 친구는 45명으로 문집 발간 준비 중에도 몇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책을 내며 가장 기뻤던 것은 1945년 종전 직전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의 포로가 되어 소식이 끊겼던 유한배(학구로 개명) 군이 1989년에 귀국하여 이 문집 발간에 참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유 군은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고위 간부로 당시 노태우 대통렬과 야당 지도자 김영삼 씨의 모스크바 방문 시 큰 역할을 하여 언론에 많이 소개된 동기생의 꽃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친구들은 모교가 있는 진주와, 부산, 서울 세 곳에서 매달 14일에 점심 모임을 가졌습니다. 1986년 가을에 수유리 여관에 일박하며, 우리는 두 사람이 남을 때까지 이 월례 모임을 계속한다고 다짐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우리 졸업 기수가 14회여서, 자연히 14회라는 이름도 지어졌습니다.

맨 먼저 이 지방 모임이 중지된 곳이 진주였습니다. 10여 년 전에 간사가 사망하고 회원 수 명이 서울, 부산 등지로 이주하여 두세 사람밖에 남지 않아 자연적으로 모임이 무산되었습니다. 서울과 부산에서는 각기 5~6명의 동기생이 꾸준히 모임의 명맥을 이어 와, 선후배들의 칭찬과 부러움을 샀습니다.

서울에서는 2년 전까지만 해도 90대 초와 80대 후반의 건강한 동기생 여섯 사람이 매달 빠짐없이 모임을 계속하여, 모임 장소인 식당 여주인까지 경탄의 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동기생 두 사람이 2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계속된 서울의 이 동기회 모임이 금년 들어서는 처음으로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남은 네 사람 중, 두 사람의 건강 사정으로 금년 들어 월례 모임을 세 번밖에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두 사람만 남아도 모임을 계속한다는 당초의 농담 섞인 다짐도 했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만이 만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병석에 있는 두 사람의 상태가 좋아지면 그때 만나자는 나머지 두 사람의 똑같은 생각으로 모임을 뒤로 미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남은 친구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제 바깥에서의 식사 모임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2년 동안 혼자서 감당해오던 부인의 간병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얼마 전 근처 요양원으로 입원시켰는데 이제 이 친구 자신도 걸음이 불편하고 식욕이 떨어져 도저히 외식할 처지가 아니라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단체에는 모교 총동창회처럼 학교가 없어지지 않는 한 무한으로 계속되는 모임도 있고, 동기회같이 어느 시점에 사라질 운명에 있는 유한 모임도 있다는 반갑지 않은 글을 오래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태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는 서가(書架) 한구석에서 20여 년 전에 낸 동기생 문집을 찾아내어 젊은 시절의 동기생들 모습과 글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군사훈련 시간에 일본인 배속장교에 혼 난 이야기, 일본으로 수학여행 가서 미운 일본인 교사를 이불 속에 가두어 혼내준 이야기 등 학창시대의 여러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저를 괴롭혔습니다.

이번에 전화 걸어온 친구는 이 문집에 ‘남의 콩이 더 커 보인다’라는 글에서 늘 아래를 쳐다보며 살려고 노력하지만, ‘안분지족(安分知足)이란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관직에도 있어 본 이 친구는, 동기생 중 가장 나이가 어리고 외모도 우리보다 훨씬 젊게 보였고, 실지로 건강한 편이었습니다.

10여 년 전 일이지만, 한번은 부산 동래 어느 유료 공원에서 동기생 전부가 경로라고 무료 입장을 하는데, 유독 이 친구에게만 경로증 제시를 요구하여 모두가 실소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친구가 이런 슬픈 전화를 걸어오니 제 심정이 평온할 수 없었습니다. 모임이 있는 날이었는데 종일 책만 들여다보며 지냈습니다.

기념문집의 총책임을 맡았던 교수였던 동기생이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여기서 이름이란 단순한 성명 3자가 아니고 그 일생을 문자화한 기록을 말하는 것이다.“로 시작되는 발간사(發刊辭)만 남기고 도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에, 70년 기념문집도 내자고 농담 삼아 하던 다른 친구도 먼저 가벼렸습니다.

이제 소식을 아는 동기생 생존자는 전국에 10명 내외입니다. 그중 자유롭게 바깥출입을 할 수 있는 친구 수는 다섯 손가락이 안 됩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다시 실감하며, 병석에 있는 친구들이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점심 모임을 재개하자고 전화해 오기를 기다립니다.

저의 초등학교 동기회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중퇴한 일본 도쿄에 있는 대학의 전전(戰前) 한국 사람 동창회도 많은 선배들의 작고로 모임이 자연 없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저를 쓸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박연철 (220.XXX.XXX.129)

황선생님,
위로의 말씀을 올립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귀감이시니,
늘 건강하시기만을 빕니다.
말코글방의 박연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