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임철순 담연칼럼
     
최인호 씨를 보내며
임철순 2013년 09월 27일 (금) 00:50:18
작가 최인호 씨를 알게 된 건 1995년이니 지금부터 18년 전입니다. 당시 나는 한국일보 문화부장이었고, 그는 한국일보에 <사랑의 기쁨>이라는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집필을 맡긴 경위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작품에 대한 열정과 애착은 대단했습니다. 장편과 대작에 오래 몰두해온 그가 모처럼 작심하고 쓴 연애소설은 베토벤의 웅장한 교향곡 사이에서 만나는 실내악처럼 편안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작가 최인호의 빛나는 가편(佳篇)이라고 할 만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에는 타고르 <기탄잘리>의 시가 곧잘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시집을 갖춰두고 그가 원고를 보내오면 대조해가며 확인했습니다. 언젠가 회사로 찾아온 그는 내 책상 밑에 있는 시집을 발견하고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기분 나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습니다.

<사랑의 기쁨>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습니다. 연재 100회가 됐을 때 나는 문학평론가이면서 정신분석의 권위자인 조두영 서울대 교수(76ㆍ현재 명예교수)에게 주인공 여성과 그 딸의 심리 분석을 토대로 소설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는 글을 위촉했습니다. 그분의 분석과 예측은 독자들은 물론 작가인 최인호 씨도 놀랄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글에 문학작품과 정신분석의 논리적 상관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연재소설을 담당하는 부장과 작가로서 만난 이후, 그와 나는 제법 자주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키도 작은 사람이 시가를 피우면서 밝게 웃는 모습이 귀여웠고, 언제나 유쾌한 개구쟁이 청년 같아서 만나는 게 즐거웠습니다. 문단의 어떤 단체에도 기웃거리지 않는 자유로운 전업작가인 점도 존경스러웠습니다. 골프도 몇 번 함께 쳤습니다. 문인들 중에는 골프를 타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즐겼습니다.

최인호 씨는 1963년 서울고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하면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까까머리 고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지자 당선이 아닌 가작으로 처리했으니 두고두고 아쉬운 일입니다. 그는 그보다 4년 후 군 입대 중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정식 작가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섭섭한 감정이 남아 있을 텐데도 한국일보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1973년 한국일보 자매지인 일간스포츠에 <바보들의 행진>을 연재했고, <사랑의 기쁨>을 마무리한 2년 뒤에는 다시 <상도>를 연재했습니다. 1974년에는 ‘이제 낡은 시대는 가고 청년들의 시대가 온다’는 내용의 시론을 한국일보에 보냈습니다. 한국일보는 이 글에 ‘청년문화 선언’이라는 ‘야심만만한 제목’(최인호 씨의 표현)을 달았습니다. 살벌하고 숨 막히는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최인호에 열광했습니다. 청바지와 생맥주 통기타로 상징되는 새롭고 젊은 대항문화는 아직도 ‘청년문화’라는 말로 건재합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1998년, 두 번째 문화부장을 하고 있던 나는 최씨에게 금강산에 다녀와 관광기를 쓰게 했습니다. 모든 신문이 유명 문인들에게 의뢰해 ‘금강산 참관기’를 실어 마치 갑작스럽게 백일장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나온 글 중에서도 최씨의 글은 단연 발군이었습니다. 금강산에 빗대어 그의 글이 바로 모든 보석 중에서도 가장 빛나고 굳센 금강이라고 말한 분도 있었습니다.

너무 특정 신문만 이야기해 미안하지만 최인호 씨는 한국일보와의 인연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언론계 사람들과 함께 앉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한국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들에게는 아직 예전의 낭만이 남아 있다.’ 낭만은 젊음이고, 젊음은 곧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와 만났을 때 ‘좋은 신문을 망쳐먹은 경영주들’을 비판하며 분개하던 것도 그런 애정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2008년 침샘 암에 걸려 투병을 하면서부터는 자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1~2년 전 당뇨 때문에 매일 열심히 걷던 그를 청계산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오히려 내 건강을 걱정해주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는 항암치료의 고통 속에서도 2011년 불과 두 달 만에 1,200장이 넘는 전작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완성했습니다. 그 작품을 읽으며 참 마음이 아리고 아팠습니다.

그 해에 두 달 먼저 발매된 내 에세이집 <노래도 늙는구나>를 보내면서 건강을 물었더니 ‘임철순 놈이 아닌 님에게’ 그 소설을 답례로 보내며 생각보다 상태가 좋다고 답했습니다. 그가 하도 악필이어서 나에게 책을 줄 때마다 ‘임철순 놈에게’라고 써주었다고 에세이집에 비꼰 일이 있는데, 그에 대한 응수로 ‘놈이 아닌 님’이라고 썼던 것입니다.

그의 문학사적 위치나 성취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환자가 아니라 작가로 죽겠다던 그가 좀 더 살아서 더 좋은 작품을 남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 자신이 말한 대로 최씨는 불교적 가톨릭신자로서 독실하면서도 자유로운 신앙인이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엔 유교의 정신세계를 깊이 천착해온 바 있으니 예수에 대한 소설이나 거대 종교를 두루 망라한 대작을 잉태하고 있었을 텐데 작품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올해로 등단 50년, 최인호 씨는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그 자신이 글을 쓴 게 아니라 누군가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쓴 것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9월 25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 가족들에게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고 말했다는데, 하늘나라에서도 조금만 쉰 뒤에 주님이 불러주는 글을 끊임없이 쓰기 바랍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일 때 청소년 잡지 <학원>에 ‘휴식’이라는 시를 투고해 우수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작가로서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그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괴테의 시 문구/'산봉우리마다 휴식이 있으리라'처럼/ 나는 휴식을 취하였노라/…/ 결코 나는 조용한 휴식에 묻힐지언정/ 결코 나는 잠을 자지 않노라….”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17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향풀집 (125.XXX.XXX.39)
임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그분의 삶을 그분의 정신을 그 분 못지않게 좋은 글로 써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또 한 번 눈물이 핑 돕니다. 그분과 같은 세대를 살면서 그 재미있고도 깊이 있는 글을 읽을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분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답변달기
2013-11-09 09:01:43
0 0
김윤옥 (39.XXX.XXX.180)
최인호씨가 서울고등학교 1 학년때 였던가
교지에 발표했던 단편 소설을 중학생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언니가 이화여고 시절 서울고 문학반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교지를 가져왔습니다.

그 때 이미 그는 지금의 작가적 성공을 예견하게 했습니다.
그 동안 그의 작품을 읽는 것으로 제 청년시기도 행복했습니다.
늘 가까이서 서로 같은 방향의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담연님도 행복한분 이십니다.
답변달기
2013-10-07 14:53:49
0 0
정종명 (220.XXX.XXX.8)
임철순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보내 주신 '최인호 씨를 보내며'라는 칼럼을 잘 읽었습니다. 저도 최인호 씨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그분을 존경합니다.

선생께서 쓰신 이번 칼럼에 '문단의 어떤 단체에도 기웃거리지 않는 자유로운 전업작가인 점도 존경스러웠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제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에는 현재 1만2천 명이 넘는 문인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 그만한 이유나 명분이 있어 문학단체에 참여한다고 보는데, 선생께서는 이 1만2천 명이 문학단체에 '기웃거리는' 폄훼의 대상으로 보이시는지요? 그리고 문학단체에 기웃거리지 않는 최인호 씨는 존경스럽고, 상대적으로 문학단체에 가입한 문인들은 존경스럽지 않는 어떤 구체적인 이유라도 있는지요?
또 '자유로운 전업작가인 점도 존경스럽다.'고 기술했는데, 문학단체는 문인 개개인의 개성을 매우 존중할 뿐만 아니라, 문인 개개인도 창작생활에서 문학단체의 간섭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문인은 없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선생의 글에서는 문인이 문학단체에 참여하면 '자유롭지 못한 전업작가'로 전락하는 듯한 내용(또는 문학단체가 문인 개개인을 간섭하고 억압하는 듯한 내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나무라시더라도 자칫 그런 오해의 소지는 충분하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덧붙이겠습니다. 고 최인호 작가는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회원이었습니다.

많은 문인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학단체에 가입(혹은 참여)하는 것도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문학단체에 참여하는 문인들을 폄훼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몇 말씀 드렸습니다.

더 좋은 칼럼을 기대하면서 건필을 빕니다.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정종명
답변달기
2013-10-03 01:05:57
0 0
이무성 (220.XXX.XXX.8)
좋은글 잘읽었습니다ㅡ비슷한 연대를 살면서 보며 느껴온 것들을 영화처럼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최인호님의 명복을 빌며 임선생님의 건강을 빕니다 ㅡ독자 이무성올림
답변달기
2013-10-01 08:12:56
0 0
김성자 (220.XXX.XXX.8)
"불교적 가톨릭신자로서 독실하면서도 자유로운 신앙인이었습니다"
정확한 표현이시네요 ..저도 최인호씨 "길없는길'에 감동 받았었습니다 글을 통하여 그분의 생각의 변화를 함께 하였는데 또 투병이라는 고통을 갖고 계시는 분들의 힘이 였는데..안타깝습니다
답변달기
2013-09-30 07:23:44
0 0
utopco (117.XXX.XXX.251)
97년에 사랑의 기쁨을 참 애뜻하게 읽었지요.
불교 신자인줄 알았는데 어느 날 천주교에 귀의한 소식을 듣고 저분이 불교와 천주교 사이에서 어떤 것을 느끼실까 라고 무척 궁금해 왔었고
가끔 서울교구 주보(기억이 틀릴수도)에 기고한 글이 참 영글게 다가왔고...
저도 사실 이분이 결국 어디쯤에서 본인의 귀천을 찾을까 했는데.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로 쉼표를 찍으셨나 보네요.
tears in Heaven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는법
거기서 임주간님도 궁금해 하시는 거대 종교를 두루 망라한 대작을 볼수 있겠지요.
이승의 것을 버리고 비우면 저승에서 다시 채워지겠지요
어야 디이야 어여쁜 우리님 가시는 먼먼길에 흰국화 만발해라
답변달기
2013-09-28 11:44:27
0 0
임철순 (220.XXX.XXX.8)
그게 산울림의 노래였나요? 꿈이더냐 생시더냐...이제 가면 언제 오나, 이런 대목도 있었지요.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13-09-28 12:58:01
0 0
이종민 (220.XXX.XXX.8)
잘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답변달기
2013-09-28 09:51:00
0 0
이승우 (220.XXX.XXX.8)
다시금 최인호 씨를 생각하게 되고, 중학생시절 열심히 봤던 일간스포츠가

생각납니다. 고우영 화백의 수호전을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도 나구요.


잊지 않고 이렇게 귀한 글들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이 승우 올림.
답변달기
2013-09-28 09:50:27
0 0
김진민 (220.XXX.XXX.8)
임 철순 대표께,


안녕하세요?
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 고문을 포함하여 여러 자유클럽 대표 분들의 좋은 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고 기대가 큽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김 진민 드림
답변달기
2013-09-28 09:49:40
0 0
바우아저씨 (220.XXX.XXX.8)
어느 누가 쓴 추모사보다 가슴에 와 닿는 글.

고마와요. 철순씨!
답변달기
2013-09-28 09:48:42
0 0
예서어멍 (211.XXX.XXX.129)
울컥합니다.

부끄럽지만 한번도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독서가 취미일리도, 겨우 한글을 읽는 정도의 지구력이라...
오늘이라도 당장 책을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그 어떤 애도의 글보다 더 가슴 아프고 아련합니다.
낭만,젊음,힘.
결코 나는 잠을 자지 않노라...

일면식도 없이, 그저 이름만 아는게 다인데 눈물이 흐르네요...
답변달기
2013-09-27 14:37:53
0 0
임철순 (220.XXX.XXX.8)
이런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흐르다니.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라고나 할까? ㅎㅎㅎ
답변달기
2013-09-28 09:44:15
0 0
이화진 (220.XXX.XXX.8)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13-09-27 08:17:26
0 0
채길순 (220.XXX.XXX.8)
부고가 애석하더니, 글을 읽은 뒤에 그 애석함이 더욱 깊습니다. 우리 청년으로 사는 법을 본받읍시다.
답변달기
2013-09-27 08:16:35
0 0
이준섭 (220.XXX.XXX.8)
최인호님과 각별한 사이였군욧. 문단에 남을 좋은 작품들 남기고 이젠 편히 쉬고 있겠죠. 최인호님의 명복을 빕니다. 넓게 보면 태어남, 죽음도 다 자연의 이법인 것 같아요. 임철순님의 건겅을 빌면서 줄입니다. 이준섭 올림
답변달기
2013-09-27 07:23:51
0 0
박병모 (220.XXX.XXX.8)
군대시절 낮에 경계근무 나갈때 소설책을 가져가 망루에서 읽곤했는데 그때 최인호님의소설도 읽곤했었지요. 오랜친분까지 있는 주필님인지라 안타까움이 너무 클것 같습니다. 그런 안따까움을 주필님 주변분들에게 주지 않도록 건강관리 잘하세요.ㅎㅎ
답변달기
2013-09-27 07:22:31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