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이원익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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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이원익을 기리며

임철순

2012년 11월 21일 (수) 01:04:17

“영남 사람들이 이원익과 유성룡을 두고 말했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嶺南人稱李完平柳西厓曰完平可欺而不忍欺西厓欲欺而不可欺)” 남학명(南鶴鳴ㆍ1654~1722)의 <晦隱集(회은집)>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등 국난을 함께 극복한 조선 중기의 두 명재상에 대한 비교는 오리(梧里) 이원익(李元翼ㆍ1547~1634)과 서애(西厓) 유성룡(柳成龍ㆍ1542~1607)의 차이를 잘 알게 해 줍니다.

이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 유성룡은 분명하고 정확해서 빈틈이 없고, 이원익은 너그럽고 부드러워 인심을 얻는 분이었습니다. 내 생각엔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지만,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다.”로 앞뒤를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불가기(不可欺)의 무서움보다 불인기(不忍欺)의 부드러움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병법에 “속일 수 있고 또 속이고 싶어도 너무 무서워 감히 속이지 못하는 사람은 맹장이고, 속이고 싶어도 너무 똑똑해 속일 수 없는 사람은 지장이며, 속일 수 있어도 너무 착해 차마 못 속이는 사람은 덕장이고, 이미 속여서 속은 것 같은데도 너무 운이 좋아 이기는 사람은 복장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리를 먼저 평한 다음 서애의 명철함을 강조한 것은 영남 사람들이 같은 영남 사람인 유성룡을 치켜세우려고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원익은 한양에서 태어난 분입니다. 아호가 오리인 이원익을 굳이 완평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나중에 호성공신(扈聖功臣)과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인 8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오리는 임진왜란(45세ㆍ이조판서)과 인조 반정(76세ㆍ영의정), 정묘호란(80세ㆍ영중추부사) 같은 조선 중기의 중요한 사건을 모두 겪었습니다. 오리는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서 가혹한 시대적 조건을 슬기와 굳은 의지, 실무에 밝은 경륜으로 극복해나간 사람입니다. 1,200만 관객 동원이 임박한 영화 <광해>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선조에 이어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조세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주창했고, 어려운 국사를 원만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해 존경을 받았습니다.

체구는 볼품이 없었나 봅니다. 키가 작은 데다 턱이 뾰족하고 콧날은 불그레하며 주근깨가 많았다고 합니다. 서장관(書狀官)으로 연경에 가는 길에 큰 내를 건널 때, 맨발로 담여(擔輿)를 멘 중인과 역관들이 “지위가 낮은 이런 녀석까지 우리가 메고 가야 하나?”라고 중국어로 투덜댔다고 합니다. 체구가 작아 우습게 본 것인데, 막상 연경에 이르러 중국 관원과 문답할 때 오리가 역관 없이 유창한 중국어로 대화하자 역관들이 대경실색했다고 합니다.

소나무를 함부로 벤 소년을 붙잡은 산지기가 근처 허름한 집 마당에서 해진 옷을 입고 앉아 자리를 짜고 있는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영감! 내일 끌고 갈 테니 이놈을 잘 붙들어 두오. 놓쳤다간 경을 칠 거요.” 산지기가 가자 그 할아버지는 아이를 바로 풀어주었습니다. 이튿날 산지기가 와서 아이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다가 의정부 하인에게 혼쭐이 났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영의정이었습니다. ‘오리 정승’ 일화에는 이렇게 늘 존경과 훈훈한 기운이 감돕니다.

오리가 84세 때의 일입니다. 승지를 시켜 오리를 찾아보게 한 인조가 “띠집이 낡아 비바람도 못 가릴 지경입니다.”라는 보고를 받고 “재상 40년에 몇 칸 모옥(茅屋)뿐이란 말인가?”라며 모든 이가 그 청렴함을 보고 느끼라는 뜻으로 직접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 집이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의 관감당(觀感堂)으로, 오리를 현양하는 충현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건물입니다.

그가 타계한 지 17년이 된 1651년, 효종은 오리를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한다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묘정 배향은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의 신위를 그가 모시던 임금과 함께 종묘에 모시는 일입니다. 이 교서에서 효종이 말하기를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가냘프나 관직을 맡으면 늠름하여 범하기 어렵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처럼 수줍으나 일을 만나면 패연(沛然)히 여유가 있다.”고 오리를 상찬했습니다. 효종의 말씀은 참 멋지고, 오리의 인격은 꼭 닮고 싶을 만큼 훌륭하지 않습니까?

오리는 유서에서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고 장지를 고르지 말고 삼년 및 기제에 선조께서 소찬으로 진설한 것을 따르라. 풍수가의 말을 신빙하지 말고 자손대대 한 산지에 장사하여 시제와 속절의 모제 제물은 단지 정결히 할 뿐 사치를 숭상하지 말고’라고 말한 인물입니다. 그런 정신을 받들어 오리의 종가는 불천위(不遷位)제사를 비롯한 모든 제사를 없애고 오리의 탄신일에 추모행사만 하고 있습니다. 불천위제사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의 신위를 사당에 영구히 모셔도 좋다고 나라에서 허락한 제사입니다.

이렇게 오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9년 동안 통독한 방송작가 신봉승(79) 씨가 최근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라는 책을 내면서 오리를 국무총리로 꼽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초점은 조선의 임금 27명과 유명인사 600~700여 명 중에서 인물을 골라 지금 체제의 행정부를 만들려면 어떻게 하는 게 최상의 진용일까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에는 역시 세종이 가장 알맞고 국무총리에는 오리가 적임이라는 게 신씨의 생각입니다. 기획재정부장관 퇴계 이황, 지식경제부장관 다산 정약용, 행정안전부장관 율곡 이이, 국방부장관 중봉 조헌, 문화부장관 연암 박지원, 법무부장관 면암 최익현, 특임장관 백사 이항복, 검찰총장 정암 조광조…이런 명단입니다. 어디까지나 문민 위주의 기용인 셈인데, 오리와 서애가 임란기간에 한결같이 옹호했던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을 국방부장관에 기용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권력 교체기입니다. 저절로 훌륭한 인물을 찾게 됩니다. 이미 잘 알려진 것 같은 인물도 재발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물이 없다고만 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특히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오리와 같은 인물이 그리워집니다. 오리는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게 없다.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게 없다.”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져 돌봐야 하며, 관속을 대하는 것도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나오지만, <맹자> 이루(離婁) 하편(下篇)의 이른바‘視民如傷’(시민여상), 백성을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이 한다는 바로 그 말입니다.

오리 이원익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덕이 있었던 명재상이었습니다. 오리와 평소 친하게 지냈고 부제학을 역임한 이준(李埈ㆍ1560~1635)이 지은 묘비명은 “공의 완전한 덕은 한 가지로 지칭할 수 없으나 가장 큰 것은 도를 지키는 것이 오직 깨끗하였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바른 것은 백세 뒤에도 헷갈리지 않겠거니와, 후세에서 참고하고자 하거든 이 비석을 보라.”라고 끝납니다. 묘비명에는 “(오리가) 수령을 지낸 곳에는 생사(生祠)가 있고 청덕비(淸德碑)가 있었으나 다 사람을 시켜 어두운 밤을 틈타 헐게 하였으니 자기 청렴을 남이 아는 것을 꺼린 옛사람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올해 7월부터 매달 ‘이달의 청백리’를 선정하고 있는 전남 장성군은 ‘11월의 청백리’로 오리 이원익을 기리고 있습니다.

김윤옥 (114.XXX.XXX.58)

이 즈음 지혜롭고 청렴한 옛 선비를 떠올리는 뜻은
우리 모두가 잠깐이나마 스스로 돌아봤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권모술수가 정치역량이기나 한 것 처럼 부끄러움도 모른 채 날마다 토해내는 저급한 인신 공격에 역겨움이 극에 이른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염치라도 차릴 줄 아는 정치집단에 성원을 보내는 깨어있는 민심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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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4 23: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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