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주의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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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주의 폭풍

김수종

2012년 11월 07일 (수) 01:49:49

미국 대통령 선거전 막판에 느닷없이 나타난 변수가 허리케인 ‘샌디’라고 합니다. 샌디는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허리케인의 예상 진로가 예보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샌디가 휩쓸고 지나간 뉴욕의 모습은 전쟁이 남긴 폐허와 같았습니다. 높이 4미터가 넘는 폭풍해일과 폭우가 맨해탄을 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지하철과 공항은 폐쇄됐으며, 전기문명의 상징인 뉴욕의 찬란한 밤은 암흑세상이 되었고, 곳곳에서 홍수로 다리는 동강나고 주택은 종잇장처럼 파괴되었습니다. 뉴욕증권거래소가 이틀 연속으로 문 닫은 것은 125년 만에 처음이라고 합니다. 텔레비전 영상에 나오는 뉴욕의 모습은 작년 봄 동일본을 강타한 지진해일의 재앙을 연상케 했습니다.

미국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샌디는 별종 허리케인입니다. 미국 동부해안에 상륙하는 허리케인이 이렇게 늦게 발생한 것도, 폭풍우의 위력이 이렇게 큰 것도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샌디를 ‘슈퍼스톰’(super-storm)이니 프랑켄스톰(Frankenstorm)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허리케인 샌디의 괴력을 보는 시민들이 마음속으로는 기후변화를 떠올리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과학자들은 허리케인 샌디의 원인을 꼭 집어서 인간이 만든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비난하지는 못합니다. 과거에도 이례적인 기상변동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샌디가 이렇게 뒤늦게 나타나 괴력을 보인 것은 온난화로 인해 바다 수온이 높아지고 공기 중의 수증기 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마치 형사가 범죄를 수사하면서 물증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지만 심증은 확실히 잡고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허리케인 샌디의 원인 논쟁을 보며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지난 8월 9일자 이 자유칼럼에 소개한 미 항공우주국(NASA)의 기후과학자 제임스 한센 박사입니다. 지난 여름 40도가 넘는 폭염과 가뭄이 미국을 덮치는 극한적인 기상상태가 계속되었을 때, 한센박사는 워싱턴포스트 기고를 통해 지구온난화 때문에 폭염은 더 자주 발생하고 더 난폭해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30년을 지구의 고(古) 기후학에 기초해서 기후변화를 연구해온 한센 박사는 보통 과학자들의 신중한 태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화석연료 사용에 의한 기후변화로 인류가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지구가 수십 년 안에 재앙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공무원의 신분인데도 데모를 하며 행동합니다. 백악관 앞에서 데모를 벌이다 공무집행방해죄로 여러 차례 체포되기도 합니다.

한센 박사는 3년 전 ‘Storms of My Grandchildren'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에게 어린 손녀가 태어났는데 지구온난화의 재앙이 그 손녀에게 밀려올 게 분명한데, 자신이 그냥 연구나 하고 말면 나중에 그 손녀가 자라 “할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한 거야”라고 물어올 것이 걱정되어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한센 박사는 북극해의 얼음이 녹아 없어지는 것에 엄청난 경각심을 갖고 있습니다. 북극해의 얼음 면적은 해마다 급속히 줄어듭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2020년이 되기 전에 9월의 북극해는 얼음이 없는 바다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얼음은 태양빛을 90% 우주로 반사하지만 바다는 80% 이상 흡수한다고 합니다. 북반구의 기후패턴을 결정하는 북극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게 한센 박사를 포함한 많은 과학자들이 염려하는 일입니다. 지구 표면을 약 7미터 이상의 두께로 깔 수 있는 분량의 그린란드 빙하가 왕창 녹아내린다면 그 자체가 재앙이 될 것입니다.

각설하고 요즘 서울을 보면 단풍이 참 아름답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북악산 성곽이나 남산에 올라보면 ‘서울은 명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 재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서울인 것 같습니다. 바다가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해일과 태풍으로부터 안전합니다.

전 세계 인구 중 10억 명이 해발 25미터의 저지대에 살고 있습니다. 뉴욕, 상하이, 홍콩, 런던, LA 등 도시 문명이 바닷가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해수면이 1미터만 상승해도 이런 도시들은 수몰의 위험에 놓인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린란드의 빙하가 다 녹아서 인천이 바다 속으로 잠겨도 서울은 땅위에 서 있을 것이니 서울이 명당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루 이틀 폭풍우가 몰아치는 기상재앙에서는 명당일지 몰라도, 기후변화의 재앙 앞에서는 명당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자연이 몰고 올 재난에서는 안전하다고 해도 세계 구석구석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현대문명사회에서 고립된 안전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허리케인 샌디의 폭풍우를 몸으로 느끼지 못했지만, 런던 파리의 증권시장의 거래량이 30~40퍼센트씩 격감하는 것을 보며 불안을 느껴야 했습니다.

아마존에서 나방 한 마리가 퍼덕인 날개짓이 뉴욕에 폭풍우를 몰고 온다는 ‘나비효과’는 이제 자연계(自然界)와 인문계(人文界)를 왕래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허리케인 샌디는 정말 정조준이라도 한 듯이 뉴욕을 내리쳤습니다. 인류문명이 고도로 농축된 도시, 뉴욕이 폭풍우에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모습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는 점에 서울 시민도 착안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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